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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후반 ===
그는 [[은언군]]의 아들이었으나 왕족으로 예우받지 못했다. 그에 관련된 기록은 대부분 철종, 고종 때 삭제되어서 알 수 없다.
[[1812년]](순조 12) [[8월]] [[사옹원]][[봉사]] 박종일(朴鍾一)과 한광우(韓光友), 이진채(李振采) 등의 모역사건이 적발되자, [[은언군]]의 아들들 중 한명을 추대하려 했다 하여 양사로부터 탄핵을 받았지만 [[조선 순조|순조]]가 사건을 무마시켜 [[전계대원군|이광]], [[이성득]] 등 다른 이복형제들과 함께 사형 위기를 모면하였다.
 
[[1812년]](순조 12) [[8월]] [[사옹원]][[봉사]] 박종일(朴鍾一)과 한광우(韓光友), 이진채(李振采) 등의 모역사건이 적발되자, [[은언군]]의 아들들 중 한명을 추대하려 했다 하여 양사로부터 탄핵을 받았지만 [[조선 순조|순조]]가 사건을 무마시켜 [[전계대원군|이광]], [[이성득]], [[이철득]] 등 다른 이복형제들과 함께 사형 위기를 모면하였다.
그는 [[은언군]]의 아들이었으나 왕족으로 예우받지 못했다. 그는 일체의 대외활동은 자제하였고, [[1826년]](순조 26)에 별세하였다. 사망지와 사망 원인은 미상이다. 사후 풍계군(豐溪君)에 추봉되었다.<ref>어느 시기에 추봉되었는지 추봉년월일은 미상이다.</ref>
 
[[1817년]](순조 17) [[11월 30일]] 이복 형 [[이성득]]이 형문을 받다가 고문치사하면서 [[조선 순조|순조]]는 은언군의 자녀들을 석방하려했다. [[조선 순조|순조]]는 특별 명령을 내려 이철득과 이쾌득을 임시로 풀어주었고<ref>"승정원에서 의계하여 죄인을 옮기면 안된다고 하였으나, 듣지 않다", 순조실록 20권, 1817년(순조 17년, 청 가경 22년) 11월 30일 기사 2번째기사</ref>, [[1820년]]에는 은언군의 생존한 아들들을 모두 석방시켜주었다. 이당도 이때 석방되어 [[한성]]으로 갔다. 이후 김시채(金時采)의 딸 광산현부인 김씨와 결혼하였다.
 
본부인인 광산군부인 광산김씨에게는 자녀가 없고, 첩인 전주이씨에게서 서자 [[익평군 이희]]를 보았다. [[1863년]](철종 14) [[11월]] [[보국숭록대부]] 행[[병조]][[판서]] [[경연]]일강관 [[김병학]]이 [[익평군 이희]]의 시호를 올린 시장에, 익평군의 생비 광산군부인 광산김씨 외에 소생모(所生母) 전주이씨의 존재를 언급하였다.<ref name="sosng">[http://yoksa.aks.ac.kr/jsp/aa/VolView.jsp?aa10no=kh2_je_a_vsu_20478_026&aa15no=026&aa20no=20478_026_0011 顯祿大夫益平君諡狀]</ref> [[조선 명종|명종]] 때인 [[1563년]] [[사림파]]가 집권한 이후, [[동성동본 금혼령]]이 내려져 [[동성동본]]의 [[결혼]]은 금지되었지만, 풍계군의 아버지 [[은언군]] 인이나 풍계군은 모두 [[동성동본]]인 전주이씨를 첩으로 두었다. 익평군의 생모 전주이씨는 전주이씨 [[선원세계]]나 [[선원보]]에 올라가지도 못했다. 그러나 [[1863년]]에 [[보국숭록대부]] 행[[병조]][[판서]] [[경연]] 일강관[[김병학]](金炳學)이 그의 시호를 청하는 시장을 올릴 때, 익평군 희의 생모 전주이씨의 존재를 언급하였다. 아버지 은언군의 첩 [[전산군부인 이씨|전주이씨]]는, 소생 서자 전계군의 아들이 [[조선 철종|철종]]으로 즉위하면서 [[전산군부인]]으로 [[추봉]]되고 묘비가 세워졌으며, 철종의 8고조도에 언급되어 알려지게 된 것이다.
 
그는 [[은언군]]의 아들이었으나 왕족으로 예우받지 못했다. 그는 일체의 대외활동은 자제하였고, [[1826년]](순조 26)에 별세하였다. 사망지와 사망 원인은 미상이다. 사후 풍계군(豐溪君)에 추봉되었다.<ref>어느 시기에 추봉되었는지 추봉년월일은 미상이다.</ref>
 
[[1849년]](철종 즉위년) [[6월 23일]] [[증직|증]] 소의대부(贈 昭義大夫)에 추증되었고, [[1851년]](철종 2) [[7월 12일]] 숙부 은전군(恩全君)에게 입후(立後)하고, [[조선 원종|원종]]의 2남 [[능원대군]](綾原大君) 8대손이며, [[안풍군]] [[이영]](安豊君 李𪸠)의 현손 [[이세보]]를 풍계군에게 입후하라고 명하였다. [[이세보]]는 풍계군의 후사(後嗣)가 되어 이름을 호(晧)로 개명하고 명선대부(明善大夫) [[경평군 (1832년)|경평도정]](慶平都正)의 작호를 받았다. 뒤에 [[증직|증]] [[현록대부]]로 다시 증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