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계대원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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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철종|철종]] 즉위 후 [[순원왕후]]의 명으로 [[은언군]], [[상계군]] 관련 [[일성록]],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실록]] 등을 대량으로 세초, 인멸해버렸기 때문에 그의 초기 삶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소실 중 한명인 [[용성부대부인| 염씨]]에게서 얻은 셋째 서자 [[조선 철종|원범]]이 [[1849년]] [[조선 순조|순조]]의 양자 자격으로 왕위에 오르면서 군호를 의망하여 전계군(全溪君)의 작호가 내려졌다가, 다시 [[대원군]]으로 추봉되어 전계대원군이 되었다. [[경기도]] [[강화군]] 출신으로 본관은 전주, 휘는 이광(李㼅), 자는 창강(昌康), 초명은 이쾌득(李快得), 이해동(李海東)이다. [[강화군]] 출신.
 
== 생애 ==
=== 출생과 가계 ===
[[1785년]](정조 9) [[4월 29일]]([[음력 3월 21일]]) [[은언군]]의 9남 1녀 중 6남이자 서자(庶子)로 탄생하였다. 원래 이름은 쾌득(快得)이었고, 뒤에 풀려난 뒤에 해동(海東)이었고으로 고쳤으며, 뒤에 창강으로 이름을 고쳤다가 다시 광으로 개명하였다. 적모에게서 태어난 적자인 이복 형 [[상계군]] 담, [[풍계군]] 당, 그밖에 이복 서형들인 성득[[이성득]], 철득, 쾌득[[이철득]] 등 아버지의 또다른 서자들이 있었다. [[조선 장조|사도세자]]의 서손자이며, [[조선 정조|정조]]의 서조카이고, 순조의 서 사촌형이며, [[조선 철종|철종]]의 사친이다.
 
아버지는 [[사도세자]]의 서장남 [[은언군]](恩彦君)이며, 어머니는 그의 소실인 전주인(全州人) 이덕희(李德喜)의 딸로 [[전산군부인 이씨]](全山郡夫人 李氏)이다. 그의 위로 동복 친형이 한명 있었지만, 일찍 요절했다.<ref>전산군부인 묘비명, 경기도 김포시 통진읍 마송리 산 13-48 소재</ref> 아버지 [[은언군]], 삼촌 [[은신군]]이 소년시절 상인들에게 진 부채가 증조부 [[조선 영조|영조]]에게 알려져 [[1771년]](영조 47) 직산에 유배되고, 다시 제주도 대정현에 안치되었다가 [[1774년]]에 은신군이 죽으면서 풀려났다. [[전산군부인 이씨]]의 존재는 [[1970년]]대 이후에 알려지게 되었고, 일부 역사서는 그를 [[상산군부인 송씨]]의 자녀인 것으로 오해하였다. 또한 그의 묘비문이 [[국사편찬위원회]] 등에 의해 판독된 것도 1970년대 무렵이었다.
 
훗날 [[김문근]]이 쓴 그의 어머니 [[전산군부인 이씨]]의 묘지명을 통해 전산군부인은 그가 태어나기 전에 아들 하나를 낳았지만 요절했고일찍 사망했고, 그가 [[전산군부인 이씨]]에게는 둘째 아들인 것이 확인되었다. 이복 형제들 중 [[풍계군]]으로 추정되었던 [[이철득]]이 풍계군과 생년이 달라 다른 인물인데, [[이철득]]이 [[전산군부인 이씨]]의 일찍 죽은 첫 아들인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이광은 왕족이었으나 아버지 [[은언군]]이 [[상계군]] 사건과 송씨, 신씨 사건 그리고 계속된 탄핵으로 유배당한데다가, 이광은 다시 [[은언군]]의 서자였으므로 작위가 내려지지 않았다.<ref>뒤에 그의 작위인 전계군과 대원군직은 철종 즉위후 추가로 추증된 것이다.</ref> [[1797년]] 아버지 [[은언군]]이 울화병이 치밀어 형 혹은 이복형인 [[이철득]]과 함께 강화도를 탈출하려다가 교동도가 보이는 해변에서 체포되었다. [[강화도]] 내에서 다시 아버지 [[은언군]]이 체포된 그 곳으로 일가족이 모두 옮겨졌다.
 
=== 강화도 살이 ===
유소년 시절과 혹은 서당을 다녔는가, 독선생을 초빙했는가 여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조선 철종|철종]] 즉위 후 [[순원왕후]]의 명으로 [[은언군]], [[상계군]] 관련 [[일성록]],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실록]] 등을 대량으로 세초, 인멸하여 그의 초기 행적에 대한 내용은 알 길이 없다.
 
본부인은 전주인(全州人) 학생 증 [[의정부]]영의정(領議政) [[최수창]](崔秀昌)의 딸로 [[완양부대부인|완양부대부인 최씨]](完陽府大夫人 崔氏)이고, 첩으로 용담인(龍潭人) 학생 증 [[의정부]]영의정(領議政) 염성화(廉成化)의 딸로 [[용성부대부인]] 염씨(龍城府大夫人 廉氏)가 있었다. 용성부대부인은 완양부대부인이 살아있을 때 들인 상태이다. 또한 그에게는 첩실인 이씨(李氏)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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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뒤 강화도 내로의 이주가 허용되어 이광은 [[강화군]] 강화읍내로 이주하였다. 이주한 철종의 가족은 [[강화도]]에 살았는데, 철종의 잠저는 현재의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441번지에 있다.<ref>강화경찰서 왼쪽 담옆 길을 따라 70m 정도 서쪽으로 들어가면 오른편으로 보이는 기와집으로 강화도령 철종(1831-1864)이 왕위에 오르기 전 19세 까지 살던 곳(잠저)이다.</ref><ref name="chol01">[http://ganghwado.com/YuMul/SiYuHyeongMunHwaJae/YongHeungGung/index.html 강화도령 철종의 잠저 용흥궁]</ref> 원래는 [[초가]]였으나, 철종 4년(1853)에 [[강화부|강화]] [[유수]] [[정기세]]가 현재와 같은 기와집을 세우고 [[용흥궁]]이라 하였다.<ref name="chol01"/> 이광의 가족은 부임해오는 [[강화부]] 유수의 감시 및 주민들의 멸시를 당하기도 했다. 철종실록의 철종 행장에 의하면 그가 [[강화도]]에 있을 당시, 한번은 그가 살던 동리에 완악하고 패려한 자가 [[술]]에 취해 그의 집 문밖에서 소란을 부리며 오만한 말과 모욕을 가했지만, 후일 아들 [[조선 철종|철종]]이 왕위에 오른 후에도 그를 문제삼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강화부]] 유수로 부임한 어떤 유수가 방어 및 지킴(방수)를 목적으로 그의 일가를 감시하는 것이 너무 가혹하므로 집사람들이 이를 고통스럽게 여겼지만, 왕위에 오른 아들 [[조선 철종|철종]]은 그 유수를 오히려 [[승정원]][[승지]]에 임명하였다한다.
 
전계대원군의 묘비문과 신도비문에 의하면 [[1822년]] [[2월]]의 어느 시점에 [[조선 순조|순조]]는 임오년을 다시 맞이했다는 이유로 그를 풀어주었는데, 그해 [[음력 윤 3월]] 그는 그때에 비로소 그는 성인식인 관례를 올렸다 한다.
 
=== 생애 후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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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모 : 이름 미상(? - [[1821년]] [[12월 16일]]<ref>승정원일기 2148권 1821년(순조 21년, 청 도광 1년) 12월 17일 계사 27번째 기사</ref>)
** 이복 서형 : [[이성득]](李成得, [[1775년]] ~ [[1817년]] [[11월 27일]]<ref>순조실록 20권, 17년(1817 정축 / 청 가경(嘉慶) 22년) 11월 27일(병인) 1번째기사, 의금부에서 강화 죄인 성득이 물고되었으니, 금부 도사를 보내 검험하라고 하다</ref>)
** 이복 서형 또는 친 형 : [[이철득]](李鐵得, [[1780년]] ~ ?, 1801년 5월, 초 아버지 은언군과 함께 [[강화도]]를 탈출, 도주하려다 실패했다.)
** 이복형제 : 이쾌득(李快得)
* 생모 : [[전산군부인 이씨]](全山郡夫人 李氏, [[1764년]] [[12월 19일]] - [[1819년]] [[6월 4일]]), 전주인(全州人) 이덕희(李德喜)의 딸.
** 친 형 : 어려서 요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