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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관학교 입교 ===
구한말 [[1906년]]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1908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교했다. 당시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는 [[1907년]] 여름에 군대해산으로 간신히 폐교를 면하고 축소된 형태로 존속했던 상태였다. 그래서 여기에 입교한다는것은 당시 굉장히 까다로워 유력한 사람의 보증이나 추천이 필요했었다. 지청천이 입교할 수 있었던데에는 그의 모친이 집안사람을 통해 엄 귀비에게 손을 쓴 결과 가까스로 입교할 수 있게 되었다.<ref name="《한국시 시만강좌,47집》,-이청천 편-,이기동 저. p186">《한국시 시만강좌,47집》,-이청천 편-,이기동 저. p186</ref> 그러나 이듬해 [[1909년]] 8월, 2학년때 [[통감부]]의 압력으로 군부가 폐지되면서 동시에 무관학교도 폐교처분을 받았다. 이 때 일본 측은 선심을 써서 재학 중인 1, 2학년 생도 50여 명을 일본의 동경육군중앙유년학교로 유학을 보내 위탁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지청천은 동기생 및 후배들과 함께 일본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ref name="《한국시 시만강좌,47집》,-이청천 편-,이기동 저. p186"/> 이 때까지는 본명인 지대형을 사용했다. 유학 도중 한일합방이 되자, [[일본 육군사관학교]] 보병과로 편입되었고, [[1914년]]에 26기생으로 졸업하였다. 중위로 진급한 후 [[1919년]]에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 교성대장이 되어 독립군 간부양성에 진력하였다. 이때 망명하면서 일본군의 병서(일종의 전술교범)와 군용지도를 가지고 갔다고 한다. 그는 독립군에서 유일하게 정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사람이었고, 지청천의 가치는 독립군에게 아주 중요하였을 것이다.
 
=== 장가 일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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