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강화 회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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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새롭게 발견된 사료 ===
* 1919년 1월 25일 프랑스 파리강화회의에 처음으로 제출된 ‘프랑스어’ 한국독립청원서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 보존돼 있는 것으로 2018년 2월 28일 확인됐다.
* 1919년 중국 상하이에서 프랑스 파리강화회의 참석을 위해 파리로 건너간 김규식(1881∼1950)이 기존에 알려진 신한청년단의 독립청원서와 함께 '한국독립공화당' 명의의 청원서도 가져간 것이다.
* 김규식이 파리에 도착해 제일 먼저 미국대표단에 제출한 문서는 신규식이 총재, 자신이 사무총장으로 표시된 한국독립공화당 청원서였다.
* 발신자는 가명을 썼으며 신규식은 '신정'(Shinjhung), 김규식은 '김성'(Kinshung)이다. 수신자는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다.
* 이번에 발견된 독립청원서는 김규식과 더불어 신규식과 동제사의 활약상을 보여주는 직접적 단서라고 할 수 있다.
* 한편 청원서에 대한 당시 미국 측 반응은 소극적이었다. 미국 대표단은 1919년 3월 말 대책회의 결과 “미국은 일본의 한국 병합을 승인했으며, 현재 이 문제는 미국 대표단에 제출할 사안이 아니다”라고 답했다. 미국 측은 당시로서는 한국 대표를 만날 필요가 없으나 미래에 활용할 경우를 생각해 이 청원서를 보관했다.
* 미국 측은 당시로서는 한국 대표를 만날 필요가 없으나 미래에 활용할 경우를 생각해 이 청원서를 보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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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정병준 교수는 최근 연구논문 ‘1919년, 파리로 가는 김규식’에서 김규식과 신규식 인맥이 매우 정교한 기획과 준비작업을 거쳐 시간 안배를 적절하게 하면서 조직적으로 독립운동을 펼친 게 확인된다고 기술했다. 지금까지 막연하게 알려진 것처럼 김규식이 단지 ‘영어를 잘한다는 이유로’ 신한청년당 대표로 선출돼 수동적으로 파리에 파견된 것이 아니라는 게 정 교수의 해석이다.
 
한편 청원서에 대한 당시 미국 측 반응은 소극적이었다. 미국 대표단은 1919년 3월 말 대책회의 결과 “미국은 일본의 한국 병합을 승인했으며, 현재 이 문제는 미국 대표단에 제출할 사안이 아니다”라고 답했다. 미국 측은 당시로서는 한국 대표를 만날 필요가 없으나 미래에 활용할 경우를 생각해 이 청원서를 보관했다.
 
== 중국의 산둥 문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