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강화 회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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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강의 그 어느 국가나, 그 누구도 아무도 김규식 일행의 [[한국]] 독립 청원을 호응해주지 않게 되면서 김규식은 크게 실망하였고, [[8월]] [[프랑스]] 파리에서 [[미국]]으로 건너갔다.<ref name="in33"/> [[8월 9일]] 김규식은 김복, [[여운홍]]과 함께 [[뉴욕 주|뉴욕]]으로 향했다. 선실에서 김규식은 활동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쉬지않고 타이프를 쳤다 한다.<ref name="in33"/>
 
=== 2018년한국독립운동 관련 새롭게 발견된 사료 ===
* 1919년 1월 25일 프랑스 파리강화회의에 처음으로 제출된 ‘프랑스어’ 한국독립청원서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 보존돼 있는 것으로 2018년 2월 28일 확인됐다.
* 1919년 중국 상하이에서 프랑스 파리강화회의 참석을 위해 파리로 건너간 김규식(1881∼1950)이 기존에 알려진 신한청년단의 독립청원서와 함께 '한국독립공화당' 명의의 청원서도 가져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