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룡 (1858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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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자이며 의병장이었던 [[김흥락]]의 제자로서 의병 운동에 참가했으나, 50세 무렵인 [[1907년]]경부터 교육의 역할을 중시하는 애국계몽운동으로 방향을 전환, [[협동학교]] 설립 및 [[대한협회]] 안동지회 창설, 시국 강연 등을 벌였다. [[유인식]], [[김동삼]]이 이때부터의 동지들이다.
그러나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고 대한협회가 해체되자, [[신민회]]의 해외 독립기지 설치 방침에 동조하여 [[1911년]] 일가족을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했다. 이상룡의 집안은 [[이회영]], [[허위]]의 가문과 함께 대표적인 항일운동 가문으로, 그를 포함해 두 동생 [[이상동]], [[이봉희]], 아들 [[이준형 (1875년)|이준형]]과 손자 [[이병화]], 조카
이상룡은 이곳에서 독립 운동을 위한 자치기구인 [[경학사]] 조직과 부속 교육기관인 [[신흥강습소]] 설치에 참여했다. 경학사는 이듬해 [[부민단]]으로, [[1919년]] [[3·1 운동]]을 기점으로 [[한족회]]로 발전된다. 신흥강습소는 이후 [[신흥무관학교]]로 개칭하여 무장 항일 운동가들을 양성하는 기관이 되었다.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는 모두 [[만주]] 지역 항일운동의 효시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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