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정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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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방정환
|출생일= {{출생일|1899|11|9}}
|출생지= {{국기나라|대한제국}} [[한성부]] [[서부]] [[당주동|적선방]] 야주현계
|사망지= {{국기|일제 강점기}} [[경성부]] [[서울대학교|경성제국대학]] 부속 병원
|사망일= {{사망일과 나이|1931|7|23|1899|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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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방운용(장남), 방하용(차남)
|부모= 방경주(부)
|친척= [[손병희]](장인) <br /> 손병흠(처숙부) <br /> 손천민(사촌 처남)
|활동 기간= [[1921년]] ~ [[1931년]]
|웹사이트= [http://www.korsofa.org/ 한국 방정환 재단]
}}
'''방정환'''(方定煥, [[1899년]] [[11월 9일]] ~ [[1931년]] [[7월 23일]])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아동문화운동가, 어린이 교육인, [[사회운동가]]이며 [[어린이날]]의 창시자이다.
 
== 이력 ==
본관은 [[온양 방씨|온양]](溫陽), 호는 소파(小波)로 [[일본]] 아동 문학가인 [[이와야 사자나미]](巌谷小波)를 존경해서 그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설도 있으나, 《동경대전》의 "용담수류사해원 구악춘회일세화(용담의 물이 흘러 온 세상 바다를 이루는 근원이 되고 구미산에 봄이 다시 돌아오니 온 세상이 꽃이구나)"라는 절구에서 가져온 것으로 용담의 작은 물결이 되어 온 세상에 퍼지고 이 땅 위에 지상천국인 봄동산을 이룩하자는 천도교 사상을 담은 것으로 천도교인 소춘(小春) 김기전과 함께 ‘소춘’ ‘소파’라는 호를 지었다는 설도 있다.(* 각주: 이상금, 《사랑의 선물-소파 방정환의 생애》, 한림출판사, 20052005년) 이외에도 잔물, 잔물결, 물망초, 몽견초, 몽중인, 삼산인, 북극성, 쌍S, 목성, 은파리, CWP, 길동무, 운정(雲庭), 파영(波影), 깔깔박사, SP생이라는 이름을 필명으로 사용하였다. 이는 [[일본]]의 언론 검열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고, 소수의 필자들이 [[잡지]]의 지면을 채워야 했기 때문이다. [[1931년]] [[7월 23일]], 오랜 지병과 [[과로]]로 인한 [[신장염]]과 [[고혈압]]으로 향년 33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이외에도 잔물, 잔물결, 물망초, 몽견초, 몽중인, 삼산인, 북극성, 쌍S, 목성, 은파리, CWP, 길동무, 운정(雲庭), 파영(波影), 깔깔박사, SP생이라는 이름을 필명으로 사용하였다. 이는 [[일본]]의 [[언론]] 검열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고, 소수의 필자들이 잡지의 지면을 채워야 했기 때문이다. [[1931년]] [[7월 23일]], 오랜 지병과 과로로 인한 신장염과 고혈압으로 향년 33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 개요 ==
[[천도교]] 3대 교주인 [[손병희]]의 사위가 된 뒤 천도교청년회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이때이 때 청년결사조직인 '경성청년구락부'를 조직했고 기관지이자 문예동인지인 《신청년(新靑年)》(1919[[1919년]]) 발행, 편집에 주도적이었다. 이 무렵 한국 최초의 영화 잡지《녹성(綠星)》(1919[[1919년]])의 편집에도 관여했다.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을 거쳐 [[일본]] [[도요 대학대학교]] 전문학부 문화학과에 보통청강생으로 입학하여[[입학]]하여 철학과[[철학]]과 [[사상 (철학)|사상]], [[아동문학]], [[아동심리학]] 등을 공부했다[[공부]]했다. [[1923년]] 최초로 본격적인 아동문학 연구 단체인 ‘[[색동회]]’를 조직하고 순수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했다. 색동회라는[[색동회]]라는 이름은 어린이들의 색동옷을 상상해서 만들어낸 이름인데, 정인섭의[[정인섭]]의 《색동회어린이운동사》에 따르면 [[윤극영|윤극영 선생이선생]]이 제안했다고 한다. 개벽사에서 발행한 《신여성(新女性)》·《학생(學生)》 등의 잡지를[[잡지]]를 편집·발간했으며, 동화대회·소년문제 강연회·아동예술 강습회·소년 지도자 대회 등을 주재하며 계몽운동과 아동문학운동에 앞장섰다.<ref name="글로벌_1">방정환, 《글로벌 세계 대백과》</ref> ‘어린이’란 말을 처음 쓰기 시작했던 그가 아동문학 활동을 한 기간은 약 10년으로 〈형제별〉·〈가을밤〉·〈귀뚜라미〉 등 많은 작품을 발표했으나, 창작보다는 번안작품이 더 많다.<ref name="글로벌_1"/> 그의 사후, 《소파전집》·《방정환 아동문학 독본》·《동생을 찾으러》·《소파아동문학전집》 등이 발간되었다. 한편 ‘새싹회’에서는 그를 기념하여 [[1957년]] 소파상을 제정하였다.<ref name="글로벌_1"/>
 
‘어린이’란 말을 처음 쓰기 시작했던 그가 아동문학 활동을 한 기간은 약 10년으로 〈형제별〉·〈가을밤〉·〈귀뚜라미〉 등 많은 작품을 발표했으나, 창작보다는 번안작품이 더 많다.<ref name="글로벌_1"/>
 
그의 사후, 《소파전집》·《방정환 아동문학 독본》·《동생을 찾으러》·《소파아동문학전집》 등이 발간되었다. 한편 ‘새싹회’에서는 그를 기념하여 1957년 소파상을 제정하였다.<ref name="글로벌_1"/>
 
== 일생 ==
=== 성장기 ===
방정환은 [[온양 방씨]] 판서공파(判書公派)의 후손이며, 순조 때 구례[[현감]](求禮縣監)을 지내고 [[병조]][[참판병조참판]]에 추증된 [[방우정]]|방우정(方禹鼎) 장군의장군]]의 동생 방우준(方禹準)의 5대손이다.<ref>[[1860년]] 온양방씨[[온양 방씨]] 대동보</ref> [[1899년]] [[한성부]] 서부 [[당주동|적선방(積善坊)]] 야주현계(夜珠峴契)(지금의 [[서울특별시|서울]] [[종로구]] [[당주동]]과 [[신문로1가]] 경계)에서 어물전과 미곡상을 경영하던 방한용(方漢龍)의 아들 방경수의 장남으로 출생하였으며, [[할아버지출생]]하였으며, 할아버지 방한용에게 [[한문]]을 배웠다. 야주개의 큰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개구쟁이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4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으로[[대가족]]으로 어른들의 사랑을[[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어린 시절 병약한 어머니에게 자랐고, 집안이 망한 일찍 출가한 누이에 대한 강한 애착이 있다. 7살 때인 [[1905년]] 삼촌을 따라갔다가 우연히 만난 김중환(金重煥) 교장의 설득으로 보성소학교 유치반에 [[입학]]하였다. 보성소학교에서는 [[입학]]하는 [[학생]]은 [[댕기]]를 자르고, [[머리]]를 깎아야 하였는데, 이를 본 [[할아버지]]는 [[전통]]을 단절해야 할 구습으로 보는 진보 지식인들의 급진성에 대한 거부감으로 매우 화를 내었다. 하지만 [[공부]]를 하고 싶어하는 손주의 뜻을 [[존중]]하여 [[학교]]에 다니는 것을 묵인하였다고 한다. [[1908년]]에는 ‘소년입지회’를 조직하여 동화구연, 토론회, 연설회 등의 [[활동]]을 하였다. 방정환의 집안은 작은할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마음씨 좋은 고모에게 식량을 꾸러 갈 정도로 가난하였다. [[1913년]] [[서울미동초등학교]]를 [[졸업]]한 방정환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선린상업고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적성이 맞지 않아 상업학교 공부보다는 신문화 흡수를 위한 [[독서]]에 주력하였다. 이 시기를 전후로 최남선이 발간한 《소년》《붉은 저고리》를 탐독했다고 한다. [[1917년]] [[최남선]]이 펴내던 잡지 《청춘》에 보낸 글이 현상문예 선외가작에 뽑혔다. 그러던 중 [[졸업]]을 1년 앞두고 당시 담임교사와 [[부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중퇴]]하고, 모처의 심부름꾼 노릇을 하며 독학의 뜻을 품었다고 한다.
 
7살 때인 [[1905년]] 삼촌을 따라갔다가 우연히 만난 김중환(金重煥) 교장의 설득으로 보성소학교 유치반에 입학하였다. 보성소학교에서는 입학하는 학생은 [[댕기]]를 자르고, 머리를 깎아야 하였는데, 이를 본 할아버지는 [[전통]]을 단절해야 할 구습으로 보는 [[진보]] 지식인들의 급진성에 대한 거부감으로 매우 화를 내었다. 하지만 [[공부]]를 하고 싶어하는 손주의 뜻을 존중하여 [[학교]]에 다니는 것을 묵인하였다고 한다.
 
[[1908년]]에는 ‘소년입지회’를 조직하여 [[동화]]구연, 토론회, 연설회 등의 활동을 하였다. 방정환의 집안은 작은할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마음씨 좋은 고모에게 식량을 꾸러 갈 정도로 가난하였다. [[1913년]] 서울미동초등학교를 졸업한 방정환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선린인터넷고등학교|선린상업고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적성이 맞지 않아 상업학교 공부보다는 신문화 흡수를 위한 독서에 주력하였다. 이 시기를 전후로 최남선이 발간한 《소년》《붉은 저고리》를 탐독했다고 한다. [[1917년]] [[최남선]]이 펴내던 잡지 《청춘》에 보낸 글이 현상문예 선외가작에 뽑혔다. 그러던 중 졸업을 1년 앞두고 당시 담임교사와 부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중퇴하고, 모처의 심부름꾼 노릇을 하며 독학의 뜻을 품었다고 한다.
 
=== 천도교와의 만남 ===
줄 116 ⟶ 106:
* [[어린이]]
* [[어린이날]]
 
== 각주 ==
<references/>
 
== 외부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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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60XXXXXXX014 어린이의 영원한 벗, 방정환- 조성운, 국가보훈처 독립운동가 (Daum 백과)
* [http://mpva.tistory.com/m/3863 어린이 사랑, 나라사랑의 길 소파 방정환 선생, 국가보훈처, 훈훈-터[온라인기자단]/훈남훈녀 온라인기자단 2016. 6. 23]
 
 
 
 
 
 
 
 
 
{{1991년-이 달의 문화 인물}}
{{2017년-이 달의 독립운동가}}
{{전거 통제}}
== 각주 ==
 
<references/>
[[분류:1899년 태어남]]
[[분류:1931년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