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정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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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초기 생애 ===
[[1678년]](강희 17년) [[12월 13일]]에 [[북경]] [[자금성]] 동육궁 중 하나인 영화궁(永和宮)에서 덕비(德妃) 오아씨에게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윤진은 학문에도 관심이 있어 황자들의 교육 기관인 [[상서방]](上書房)에서 유교의 경전과 불경을 고루 암송하였고 무예와 사냥을 학문보다 더 좋아하는 전형적인 무인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안 강희제는 윤진을 비롯한 황자들이 깊숙한 궁궐에서 살면 유약해지고 자신만 알게 되어 욕심만 많아지며 퇴폐적으로 변할 것을 염려하여 밖에 자주 데리고 나갔다. 부황인 강희제는 윤진을 엄격히 가르쳤으며, 모험심이 강한 윤진은 중국 전역을 여행하며 식견을 넓혔다. 윤진의 활솜씨는 가히 황자들 중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여 80근의 강궁을 능히 다루어 백발백중이었다. 이를 곁에서 본 강희제가 사냥에는 언제나 윤진을 데리고 나갔다고 한다.<ref>Mode, Frederick W. ''Imperial China 900 - 1800'', Harvard University Press, [[1999년]]. ISBN 0-674-01212-7 888쪽</ref> 또한 윤진은 황자로서 강희제의 북경의 민정시찰 미행과 남쪽 순행을 수행하였다. 강희제의 셋째 황후인 [[효의인황후]](孝懿仁皇后)는 자식이 없었는데, 윤진을 매우 총애하여 양자로 삼기도 하였다.<ref name="소동자">{{웹 인용| url = http://www.epochtimes.co.kr/news/article.html?no=10675| 제목 = 예언 속의 ‘원명거사’, 옹정제|확인일자= 2008-09-05| access작성년도= 2008| 저자 = 소동자| 저자링크 = |날짜= 2008-06-01|형식= HTML|발행인=대기원시보|언어= 한글|원본일자= |인용= }}</ref> 효의인황후는 [[1689년]](강희 28년) 죽을 때까지 윤진의 교육에 신경을 쓰고 강희제가 정무를 보는 도중에 붓을 놓거나 옥새를 가져오는 등 강희제의 잔시중을 들게 하여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만들었다.<ref name="소동자"/> 12살이 되는 그 해에 윤진은 황족 중 세 번째로 높은 작위인 [[패륵]](貝勒)에 봉해졌다.
 
[[1696년]](강희 35년) 강희제의 몽골의 칸 [[가르단]] 원정 때 정홍기(正紅旗) 부대의 명예대장이 되어 몽골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알타이 산맥]]에 숨어 있던 가르단을 추격하던 도중에 가르단 군대의 기습이 있었으나 이를 물리치고 역으로 가르단의 군대를 섬멸하였다. [[1698년]](강희 37년)에 윤진은 가르단의 군대를 찾아내어 섬멸한 공을 높이 사서 [[군왕]]에 봉해지고 옹군왕(雍郡王)이라 불렸다. 이후에는 주로 내정(內廷)에서 활약하여 병부와 호부의 일을 관장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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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의 가장 큰 경쟁자들은 서장자이자 황장자인 직군왕 [[윤시]], 3남 성친왕 [[윤지]], 8황자 염친왕 [[윤사]], 14황자 순군왕 [[윤제]]였다. 형제들이 자신도 의심하는 것을 이미 알고 있던 윤진은 자신의 관저인 옹왕부에 틀어박혀 [[승려]]들과 불도를 논하여 정치에 미련이 없는 것처럼 위장하였다.<ref name="소동자"/> 그로 인해 윤진은 강희제에게 파당을 만든다는 핀잔을 다른 형제들보다 더 적게 들을 수 있었다. 또한 부황에게는 언제나 충효를 다하며 형제들과는 우애가 깊은 척 하여 강희제가 마음을 놓고 윤진을 허물없이 대하였다. 당시 이부의 관리였던 [[임백안]](任伯安)이라는 사람이 《관가백추도》(官家百醜圖)라는 책을 지었는데, 이 책에는 당시 조정에서 근무하는 고관대작에서부터 무명의 미관말직이 받는 뇌물과 그 양, 그에게 청탁 뇌물 등을 바친 자들의 이름이 상세하고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당시 황자들은 이 책을 이용하여 신료들과 조정을 장악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윤진은 이 책 상자를 찾아내어 불태워버리고 임백안을 능지처참하였다. 부황 강희제는 처음에 크게 화를 내며 윤진을 나무랐으나 윤진은 오히려 이것을 불태우지 않으면 나라에 대혼란이 오고 이것을 악용하여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피를 보게 된다고 간언하여 강희제는 앞일을 내다볼 줄 아는 윤진을 칭찬하였다.<ref>{{웹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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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nowiki>[시론]</nowiki> X파일 관가백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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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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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 강희제의 탄신일 때, 다른 황자들은 언제나 고가의 진귀한 보물들을 부황에게 바친 반면, 옹정제는 자신이 손수 금가루로 쓴 불경을 강희제에게 선물하였다는 것은 옹정제의 불심과 성실함, 그리고 검소함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옹정제의 불교에 대한 믿음은 조부인 순치제와도 비슷하다. 옹정제는 정책의 기초로 언제나 불법을 생각하여 민생을 중요하게 여겼다. 또한 [[1712년]](강희 51년)과 [[1713년]](강희 52년) 사이에는 무려 7번이나 법회를 주관하여 자신의 깊은 불심을 증명하였다.<ref name="소동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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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자료 ==
{{위키공용분류|Yongzheng Emperor}}
{{포털|중국|역사}}
{{참고 자료 시작}}
* 《청사고》(淸史稿) -〈세종헌황제실록〉(世宗憲皇帝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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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셰가오더, 《수완 (사람을 부리는 기술)》, 아라크네, 류방승 옮김, [[2007년]], ISBN 978-89-92449-13-7.
{{참고 자료 끝}}
 
== 외부 링크 ==
{{위키공용분류|Yongzheng Emperor}}
{{포털|중국|역사}}
 
{{청나라 황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