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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북도]] 의주군 고관면 상고동에서 출생하였다.<ref>{{웹 인용|url=http://www.mpva.go.kr/narasarang/month_hero_view.asp?id=406&ipp=12|제목=이달의 독립운동가 ㅣ 이달의 독립운동가|언어=ko|확인날짜=2017-06-08}}</ref> [[1894년]] [[개신교]]에 입문했다. [[1897년]] 전도사가 되었고, [[1907년]]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일명 평양신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여 한국 최초의 장로교 목사 일곱 명 중 한 사람이 되었다. [[민족대표 33인]]의 일원이었던 [[길선주]]와는 평양신학교 동기생이다.
 
선교사들과 더불어 [[선천군|선천]]에 신성중학교와 보성여학교를 설립하고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집회 강사로 활동하면서 [[평양]]의 [[안창호]], [[정주시|정주]]의 [[이승훈 (1864년)|이승훈]]과 함께 평안도 지역의 대표적인 기독교 교육 사업가로 꼽히던 중, [[1911년]] [[105인 사건]]에 [[신민회]] 인사들과 같이 연루되어 징역 6년형을 선고받고 2년간 복역하였다. 출옥 후 [[1914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부회장, [[1916년]] 총회장에 선출되었다.
 
[[1919년]] [[3·1 운동]] 때는 미리 [[경성부]]에서 [[천도교]]와의 연합을 의논하고 돌아온 이승훈을 [[이명룡]], [[유여대]], [[김병조 (1877년)|김병조]] 등 이 지역의 [[기독교]]계 인사들과 함께 만난 뒤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참가하기로 결정,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태화관]]에서 열린 낭독 행사에 참여했다. 선천에서는 신성중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여 배포했다.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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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분류:민족대표 33인]]
[[분류:한국독립당]]
[[분류:장로회신학대학교 동문]]
[[분류:선천군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