랴오양시: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TedBot (토론 | 기여)
잔글 봇: 문단 이름 변경 (바깥 고리 → 외부 링크)
잔글편집 요약 없음
53번째 줄:
[[고구려]]가 양평(襄平)을 차지한 후 요동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하고 설치한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는 후에 소재지를 평양에서 이곳 양평으로 옮겼다.
 
[[요나라]] 시대에 요양으로 개명하여 요의 부도(副都,陪都)[[동경도 (요)#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동경 요양부]](東京遼陽府)가 되었다. [[금나라]]도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를 부도(副都)로 하였다. 이 시기 동경에 있었던 황족 烏禄은 제 4대 황제 [[해릉왕]](海陵王)에 반항하는 세력에 의해 옹립되어 해릉왕을 멸하고 제5대 황제 [[금 세종]]으로 즉위하여 요양에 백탑(白塔)등을 건설하였다.
 
[[원나라]]는 요양 행중서성(遼陽行中書省)을 두었고, [[명나라]]는 요동도사(遼東都司)를 이곳에 설치하였다. [[후금]]은 1622년 요양으로 천도하였다가 요양의 교외에 동경성을 쌓았다. 3년후 봉천(奉天)으로 천도할 때 동경성의 목제와 석재가 봉천으로 운반되어 동경성은 폐허가 되었다. 요양은 그 후 요양주로 개칭하고 봉천을 본거지로한 성경장군(盛京将軍, 후의 봉천성 (奉天省))의 아래에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