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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양'''(朴定陽, [[1842년]] [[2월 4일]]( [[음력 12월 24일|음력 1841년 12월 24일]]) ~ [[1905년]] [[음력 11월 19일]]<ref>[http://yoksa.aks.ac.kr/dataFiles/img/book2/8/JE_A_80560/JE_A_80560_001_000011.gif 박정양시장 [朴定陽諡狀]]</ref>)은 [[조선]] 후기의 문신, 외교관, [[내각총리대신]], [[대한제국]]의 정치가이다. 구한말의 온건 개화파 정치인으로 활동하였으며, [[김홍집 내각]]에 참여하였다. [[조선]]의 첫 주미국 대사이기도 했다.
 
== 개요 ==
[[1866년]](고종 3) 문과에 급제, 참판 등을 지내고, [[1881년]] [[조사 시찰단]]을 조직하여 일본의 문물을 시찰하고 돌아와 관제 개정을 추진했다. 87년 미국특파 전권대사로 부임하여 외교활동을 하다가 [[청나라]]의 압력으로 귀국해야 했다. [[1894년]] 1차 김홍집 내각의 학부대신이 되고, 이듬해 김홍집 내각이 붕괴하자 내각총리대신이 되어 과도내각을 조직했다. 그뒤 [[갑오개혁]] 때 군국기무처의 회의원이 되고 제2차 김홍집 내각의 학부대신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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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서광범]] 등과 함께 [[미국]]에서 [[조선]]을 자주 독립국으로 승인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미국은 조선을 청나라의 속국이 아닌 동등한 외교국가로 인정하였다. 그 뒤 청나라의 압력으로 사직하고 [[1889년]] 귀국하였다.
 
=== 주미대사미국 전권대신 활동 ===
고종이 박정양을 주미미국 공사로전권대신으로 임명한 것은 1887년 7월 8일로 임명 후 한달 남짓 부임준비를 한다음 고종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미국으로 출발하려고 했다.그러나 출발 직전 청국(淸國)의 항의로 출발을 늦추지 않으면 안 되었다.청국은 외교사절을 서양에 파견하려면 왜 미리 상의 하지 않았느냐고 따지고 국가 재정이 어려운데 외교사절을 미국에 상주 시킨다는 것은 무리라는 것이었고 또한 외교 사절의 호칭문제를 문제 삼았다.
그러나 교섭을 벌인 끝에 호칭은 전권공사의 호칭을 사용하되, [[청나라]]의 요구를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하여 [[위안 스카이]]와 영약삼단(另約三端) 조약을 맺었다. 영약삼단의 내용은 "조선의 외교사절(공사)은 ① 주재국에 도착하면 먼저 청국공사를 찾아와 그의 안내로 주재국 외무성에 간다. ② 회의나 연회석상에서 청국공사의 밑에 자리를 잡는다 .③ 중대사건이 있을 때 반드시 청국공사와 미리 협의한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박정양은 미국에 도착해서 부터 영약삼단을 무시하고 독자적인 외교활동을 했다.워싱턴에 도착하고 그 다음날 [[1월 10일]] [[미국]] 국무성으로 베이어드 국무장관을 예방하여 한문으로 쓴 국서의 부 본과 영문독본을 제출하고 미국 대통령에게 국서를 봉정하는 날자를 잡았다.이러한 사실을 안 워싱턴 주재 청국공사는 박정양에게 사람을 보내어 영약삼단을 이행 하라고 따졌다. 그러나 박정양은 본국을 떠나 올 때 너무 급하게 서둘다가 정부의 지시를 자세히 받지못하고 왔으며 영약삼단을 따를 수 없다고 영약삼단을 지키지 않았다. 박정양은 계속 [[영약삼단]]을 지키지않고 청국공사와의 불화 등이 문제가 되어 부임한지 1년이 채 못되어11개월만에 귀국하게 되었다.
 
박정양은 미국에서 전권대신으로 활동한 경험을 [[1888년]] 미속습유'(美俗拾遺)에 썼다. 박정양은 미속습유에서 "이 나라는 여러 사람이 마음을 합해 만든 나라로 권리가 주인인 백성에게 있다. 그러므로 비록 보잘것없는 평민이라 할지라도 나랏일을 자기 일처럼 돌보아 마음과 몸을 다하여 극진히 하지 않음이 없다."라면서 미국의 [[민주주의]]를 기억했다.<ref>{{뉴스 인용|url=http://v.media.daum.net/v/20180507115217611?d=y|제목=130년전 조선 외교관 눈에 비친 미국은 어땠을까|날짜=20180507115216|뉴스=다음 뉴스|언어=ko|확인날짜=2018-05-07}}</ref>
 
=== 김홍집 내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