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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규'''(楊規, 미상 ~ [[1011년]] [[3월 5일]]([[음력 1월 28일]]<ref name=a>『고려사』 권4, 「세가」4, 현종 2년(1011) 1월 28일(임인)</ref>))는 [[고려]] 중기의 무신으로 [[제2차 고려-거란 전쟁]] 때 크게 활약했다.
== 생애 ==
[[고려 목종|목종]] 때 여러 차례 승진해 형부낭중(刑部郎中)이 되었다.<ref name=b>『고려사』 권94, 「열전」7, 양규 </ref>
 
[[1010년]](현종 원년) [[고려-요 전쟁|제2차 고려-거란 전쟁]] 당시 양규는 [[흥화진]]을 지켰고 [[거란]]이 수차례 항복을 권유하였으나권유했으나 이에 응하지 않았고 거란은 [[통주]]를 공격하여 총사령관 [[강조]]가 이끄는 고려군을 격파하고 다시 양규에게 항복을 권하는 서신을 [[강조]]가 쓴 것처럼 꾸며 [[흥화진]]에 보냈으나 "우리는나는 왕의왕명을 명령으로받고 싸우지왔으니 강조의 명령으로명령은 싸운게받지 아니다않겠다."하며 지켰다.<ref name=b/>
 
양규는 흥화진에서 [[곽주]]로가군사 군사7백여 700명을명을 이끌고 강조의통주까지 부하를 구했으며군사 거란군1천여 6000명을명을 공격해수습했으며, 성을밤중에 탈환하고곽주로 백성잠입하여 7000명을잔류한 데리고거란 [[통주]]로병사들을 갔고급습하여 수도모조리 [[개성특급시|개경]]이죽인 거란에 의해 함락되고안에 있던 남녀 7천여 명을 통주로 옮겼다.<ref name=b/> 하지만 수도가 거란에게 함락되고 [[고려 현종|현종]]이 [[나주시|나주]]까지 피란가는 사태가사태까지 벌어졌다.
 
[[1011년]](현종 2년) 봄 거란군이 철병하게철수하게 되자 [[구주]] 방면에서 돌아가는 거란군을 지키고 있다가 부하 [[김숙흥]]과 함께 거란군을 기습해 2000명을 죽이고 포로가 되었던 남녀 2,000여명을 구출했으며 석령에 이르러 다시 거란군 2500명을 베고 포로 1000명을 구출하였다.<ref name=b/>
 
여리참에서는 거란군 1,000명을 죽이고 포로가 된 1,000명을 구출했고 다시 거란의 선봉과 애전에서 싸워 1,000여명을 베었다. 그리하여 고군에서 순월 사이에 7차례나 거란군을 기습해 적 6500명을 죽이고 포로가 된 백성 3만 명을 구출했으며 헤아릴 수 없는 전리품을 노획했다.<ref name=b/>
 
애전에서하지만 군사와 화살이 다 떨어져 김숙흥과 함께 [[거란 성종]]이 이끄는 주력 부대에 항전하다가 함께 전사했다.<ref name=a/><ref name=b/>
== 후손 ==
증손으로 양제보(楊齊寶)가 있는 것이 확인된다.<ref>『고려사』 권13, 「세가」13, 예종 4년(1109) 2월 28일(계묘); </ref>
== 양규가 등장한 작품 ==
* 《[[천추태후 (드라마)|천추태후]]》([[KBS]], [[2009년]]~[[2009년]], 배우:[[홍일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