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의 역사 (1917년 ~ 1927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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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닌의 사망과 스탈린의 집권 ==
 
[[1922년]]부터 [[레닌]]이 각종 병에 시달리게 되자, 공산당 서기장의 직책에 대한 중요성이 떠올랐다. [[스탈린]]은 4월부터 공산당 서기장이 되어 [[지노비에프]], [[카메네프]]와 함께 당의 권력을 잡았으며 동시에 [[트로츠키]]의 부상을 견제하였다. 스탈린에 대한 레닌의 의심은 계속되었으며, [[1922년]] 겨울에는 스탈린의 해임을 촉구하는 서한을 작성하였다. 스탈린은 건강상의 이유를 대며 레닌을 배제한 채, 당 기구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시켜 나갔다.
 
한때 지노비에프와 [[부하린]]은 스탈린 위주로 권력이 재편성 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트로츠키를 통해 스탈린을 견제하려는 시도를 하였으나, [[1923년]] 가을부터는 다시 스탈린-지노비에프-카메네프의 지도체제가 계속되었다. 레닌이 죽기 직전에 치뤄진 12번째 당 대회에서 트로츠키는 레닌의 유언을 들어 스탈린을 비판하였지만, 대세에 영향을 주지 못하였다.
 
결국 레닌은 [[1924년]] 1월에 병으로 죽고, 스탈린의 해임을 촉구하는 레닌의 유언은 당 중앙위원회에서만 낭독되었을 뿐 출판되지 않았다. 스탈린의 서기장 자리 역시 그대로였다. 이후 스탈린은 자신의 최대 정적이자 좌익 반대파의 수장인 트로츠키에 대한 공격을 시작한다. [[1925년]] 1월, 트로츠키는 국방상(Commisar of War)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어 스탈린은 [[일국사회주의]]를 주장하며, 세계적 차원으로 혁명이 확대되어야 한다는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을 비판하였다. 1920년대에 일었던 유럽의 혁명적 정세가 점점 약화됨에 따라,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가 점점 설득력을 얻었다.
 
이처럼 트로츠키가 권력의 핵심에서 점점 소외되자 스탈린과 함께 핵심 간부층이었던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가 다시 스탈린으로의 권력 집중을 우려하기 시작했다. 우선 그들은 스탈린과 부하린이 주도하는 신경제정책을 자본주의로의 복귀라 비판하였다. 1925년 12월의 14차 당 대회에서 이러한 갈등이 표면화되었으며, 출판되지 않은 레닌의 유언 문제가 다시 제기되었다. 스탈린은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를 비판함과 동시에, 트로츠키를 정치국에서 완전히 배제하였다. 이 때부터 스탈린에 대한 개인 숭배 현상이 시작되었다. 스탈린은 '지도자'로 불리웠으며, 스탈린에 대한 대표단의 열성적인 찬양도 시작되었다.
 
트로츠키는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를 끌어들여 스탈린과 부하린의 정책에 반대하는 [[연합 반대파]]를 구축하였다. 하지만 [[1926년]] 경부터 이들의 정치적 영향력은 현저히 감소하였으며, 심지어 1927년 10월에는 중앙위원회에서의 자리마저 빼앗기게 된다. 15차 당 대회가 열리기 직전인 11월에 트로츠키와 지노비에프는 공산당에서 제명당했으며, 연합 반대파가 반대 의견을 표시할 모든 기회를 봉쇄하였다. 결국 지노비에프는 스탈린에게 항복하고, 자신의 연합 반대파 행동을 '반레닌주의'로 규정하였다. 트로츠키를 비롯한 소수의 반대파들에 대한 비난과 조롱은 계속되었고, [[1928년]] 초에 그들은 유배형에 처해지게 된다. 트로츠키는 [[카자흐스탄]] 지방으로 보내졌다가 이듬해에 국외추방을 당하게 된다.
 
좌파적인 반대파를 이끌었던 트로츠키를 제거한 스탈린은 농업 집산화와 빠른 공업화를 추진했다. 이번에는 기존에 자신과 함께 신경제정책을 지지하던 부하린의 비판을 받았다. 부하린과 그를 지지하는 [[우익 반대파]]는 스탈린의 경제성장 정책이 농민층의 이반을 낳을 것이라 비판하며 레닌의 유언까지 언급하였다. 하지만 이미 스탈린은 주요 당 기구를 장악하고 있었으며, '합법적'인 경로를 통해 많은 권력을 조종할 수 있는 권한을 획득하였다. 부하린은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를 끌어들였지만 스탈린의 권력을 비판할 만한 여력은 남아있지 않았다.
 
[[분류:소련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