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당 (대한민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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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당'''(自由黨)은 [[1951년]] [[12월]]에 [[대한민국]]에서 창당된 보수정당이며 대통령 [[이승만]]을 당수로 하였으며, [[장택상]] · [[이범석 (1900년)|이범석]] · [[장면]] · [[배은희]] · [[이기붕]] · [[함태영]], [[이갑성]], [[백성욱]]이 주요 간부였다. 최초 공화민정회(共和民政會)와 5개 정치, 시민단체인 [[대한청년단]], [[국민회 (1945년)]], [[대한노동조합총연맹]], [[농민조합연맹]], [[대한부인회]] 등이 연합하여 출범하였다.<ref>[http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729126&cid=42140&categoryId=42140 (21세기 정치학대사전)자유당]</ref> 여기에 [[한민당]] 탈당파, [[대한국민당 (1948년)|대한국민당]] 탈당파, 그리고 원외 자유당을 창당한 [[조선민족청년단]]이 추가적으로 참여하였다. [[1951년]] 이후 [[대한민국 제1공화국|제1공화국]] 기간 중 여당으로 존속하였고, [[1960년]] 이후 해체 위기를 겪었으며 일부는 탈당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과 [[신민당]] 등으로 건너가기도 했다. [[대한민국 제3공화국|제3공화국]]에서 극소수 의원만 남은 군소정당으로 존속하다가 해체된다.
 
== 창당 과정 ==
친이승만계 공화민정회(共和民政會)와 5개 기간사회단체인 [[대한청년단]], [[국민회 (1945년)]], [[대한노동조합총연맹]], [[농민조합연맹]], [[대한부인회]]이 주축이 되어 창당, 조직되었다.<ref>[http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37874&cid=46626&categoryId=46626 한민족문화대백과-자유당]</ref> 별도로 [[조선민족청년단]] 출신인 [[이범석]](李範奭) 등의 원외세력이 원외 자유당을 창당시켜 두개의 자유당이 한 지도자 아래 탄생하였다.
 
* [[1952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승만]]은 [[1951년]] [[8월 15일]]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정당을 조직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고,<ref>서중석,〈한국전쟁과 이승만정권의 권력강화〉《역사비평》제9호(1990년 여름)141쪽</ref> [[1951년]] [[8월 25일]] 신당 조직에 관한 담화문을 발표하였다.<ref>연시중,《한국정당정치실록2:6·25전쟁부터 장면 정권까지》(지와사랑,2001) 37쪽.</ref> [[1951년]] [[8월 31일]] 주중 대사로 있던 [[이범석 (1900년)|이범석]]이 귀국하고,<ref>강준만,《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 258쪽.</ref> [[이승만]]은 [[이범석 (1900년)|이범석]]에게 자유당 창당을 맡겼다.<ref>강준만,《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 259쪽.</ref> 이것은 [[이범석 (1900년)|이범석]]의 탄탄한 [[조선민족청년단]] 조직 기반을 이용하고 여기에 가장 조직이 큰 5개 사회 단체([[대한독립촉성국민회|대한국민회]], [[대한청년단]],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대한노동조합총연맹]], [[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농민조합총연맹]], [[대한부인회]])를 자유당 산하 기간 단체로 편입시켰다.<ref>윤용희,〈자유당의 기구와 역할〉,한배호 편《한국현대정치론1: 제1공화국의 국가형성, 정치과정, 정책》(나남,1990),279~281쪽</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