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창궁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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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제21대 [[왕]]인 희종과 성평왕후의 셋째 딸이며, 생몰년은 명확하지 않다. [[성씨|성]]은 [[왕씨|왕]], [[본관]]은 [[개성 왕씨|개성]]이다. [[고려 고종|고종]]의 왕비 [[안혜왕후|안혜태후]]의 친동생이다.
덕창궁주의 아버지 희종은 [[무신정권]] 시기에 즉위한 왕으로, 재위 중 당대의 권력자이던 [[최충헌]]을 제거하려다 실패하여 도리어 최충헌에게 폐위되고 유배를 가게 되었다<ref>[
=== 공주 시절 ===
덕창궁주의 삶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으며, 영가후로 봉해진 [[우봉 최씨]] [[최전]]과 혼인했다는 기록만 있다<ref>《고려사》권91〈열전〉권4 - 덕창궁주</ref>. 그러나 이 혼인은 당시 고려 왕실의 혼인에서 다소 특이한 양상을 띠는데, 덕창궁주는 당시 왕후 소생의 적녀 중 유일하게 종실이 아닌 사람과 결혼한 경우이다. 당시 고려의 공주들은 원칙적으로 종실과 혼인하였으나, [[무신정권]]이 시작된 후 무신들은 신분 상승을 위해 공주와의 결혼을 추진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덕창궁주의 혼인도 이러한 노력의 산물로, 최전의 아버지인 [[최충헌]]이 추진하여 성사된 결혼이다<ref>[
한편 최충헌이 폐위시킨 희종은 폐위 후 최충헌과 사돈이 되면서 그 목숨과 영화로운 삶을 보장받게 되고, 1219년(고종 6년) 음력 3월에는 최충헌에 의해 [[개경]]으로 환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희종은 1227년(고종 14년) 음력 3월 최충헌의 또다른 아들인 [[최우]]에 의해 [[강화도]]로 다시 유배를 떠나고, 결국 죽을 때까지 개경으로 돌아오지 못하였다<ref>{{서적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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