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새: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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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새는 외교문서에 사용되는 국인(國印, 대보(大寶)로 통칭)과 국내용 보인(寶印)으로 대별된다. [[갑오개혁]] 이전까지의 국인은 대부분 중국 역대 왕조의 황제들에 의해 사여(賜與)되어 들어왔고, 기타의 보인들은 국내에서 제작되어 사용되었다. [[환웅]]이 [[환인]]으로부터 받아가지고 왔다는 [[천부인]]이 역사상 나타난 최초의 국새라는 주장이 있고, [[증보문헌비고]]에 [[부여]] 예왕(濊王)이 예왕지인(濊王之印)을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삼국 시대]]에는 기록이 없으나, 중국과의 외교관계 문서에 국인을 사용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 시대]]에는 [[금나라]], [[요나라]], [[원나라]], [[명나라]] 등에서도 인장을 만들어 보내왔다. 원나라에서는 부마국왕선명정동행중서성(駙馬國王宣命征東行中書省)의 도장을 보내 왔으며, 1370년([[공민왕]] 19년)에는 명나라에서 고려국왕지인(高麗國王之印)이라는 도장을 보내 왔다.<ref name="행정"/>
 
[[조선]]이 건국되자 1403년(태종 3년)에 명나라로부터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이 수여되었고 [[조선 세종|세종]]은 체천목민영창후사(體天牧民永昌後嗣: 하늘의 뜻을 본받아 백성을 다스려 후세에 번영도록 하라)를, [[조선 성종|성종]]은 시명지보(施命之寶)를 각각 만들어 사용하였다. [[조선 영조|영조]] 때에는 국새의 종류가 많아졌는데, 대보(大寶), 시명지보, 이덕보(以德寶), 유서지보(諭書之寶), 과거지보(科擧之寶), 선사지기(宣賜之記), 동문지보(同文之寶), 규장지보(奎章之寶), 준철지보(濬哲之寶), 준명지보(濬明之寶), 홈문지보흠문지보(欽文之寶), 명덕지보(命德之寶), 광운지보(廣運之寶) 등을 사용하였다. 1636년([[조선 인조|인조]] 14년)까지 대중국 외교문서에만 사용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이후에는 [[청나라]]에서 만들어준 대보를 사용하였으나 [[조선 숙종|숙종]] 때 명나라에서 준 옛 국인을 모조하여 왕위 계승 의식에 사용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에는 이전의 대보를 폐지하고 1881년 ~ 1882년경에 제작한 대조선국보(大朝鮮國寶)와 대조선대군주지보(大朝鮮大君主之寶) 등을 사용하였다. 1897년에 [[대한제국]]이 수립되면서 국새로 대한국새(大韓國璽), 황제지새(皇帝之璽), 황제지보(皇帝之寶), 칙명지보(勅命之寶), 제고지보(制誥之寶), 시명지보(施明之寶), 대원수보(大元帥寶), 원수지보(元帥之寶) 등을 제작하여 사용하였다.<ref name="행정"/>
 
=== 현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