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눌푸스 카린티아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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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Dalimil1.jpg|썸네일|170px|왼쪽|아르눌프와 봉신들이 그려진 양탄자, [[수사]]로 위장한 [[모라바]][[대공]] [[스바도풀크 1세]]가 있다.]]
 
[[894년]] [[스폴레토의 귀도 3세]]가 죽자, [[교황 포르모소]]는 아르눌프에게 다시 한번 [[이탈리아]]를 공략하여 교황령을 해방시켜줄 것을 촉구했다. [[895년]] [[9월]] [[교황 포르모소|포르모소]]는 편지를 보내 도움을 요청했고, 9월초 아르눌프는 거병하여 이탈리아에 다시 개입하였다. [[895년]] [[10월]] 재빨리 [[이탈리아]] 북부를 손에 넣고, 같은 달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에 도착했다. 그는 빠르게 [[알프스 산맥]]을 넘어 [[파비아]]에 도착했으며, 서서히 [[토스카]] 지역까지 진군했다. [[밀라노 백작 마기눌프]], [[파비아]] [[백작]] 왈프레드발트프레드 등이 합류했고, [[토스카나]] [[후작]] [[아달베르토 2세]]는 [[스폴레토의 람베르토 2세|람베르토 2세]]를 포기했다. 이때 아르눌프와 그의 군사들은 추위와 눈보라 등 악천후와 [[감기]], [[폐질환]] 질병에 시달렸고, 일부 병사들이 [[아사]], [[동사]], 감기환자 등이 속출했다. 출정 전, [[프리울리]] 후작 [[베넬가리오 1세|베렝가리오]]가 병력 지원과 [[군량]] 조달을 약속했지만 갑작스러운 기후악화로 [[베넬가리오 1세|베렝가리오]]의 군량, 물자 지원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겨우 [[로마]]에 도착했다. [[토스카니]]에 도착하자 [[밀라노]] [[후작]] 마기눌프(Maginulf)와 [[파비아]] 후작 [[발프레드발트프레드]](WalfredWaltfred)가 그를 도왔다. [[토스카니]] [[후작]] [[아달베르토 2세 (토스카니)|아달베르토 2세]](Adalbert II)도 결국 [[스폴레토의 람베르토 2세|람베르트]]를 포기하고 그의 편에 합류하였다.
 
[[896년]] [[2월 21일]] [[교황 포르모소]]에 의해 로마 시내가 열리면서 아르눌프의 군사는 [[로마]]시 주변을 점령하고, 아르눌프는 [[로마 시 원로원]]의 호위하에 로마에 입성하였다. [[2월 22일]] [[교황 포르모소]]에의 의해 [[세례|기름 부음]]을 받고,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받은 뒤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대관식을[[대관식]]을 치렀다. [[성 바오로의 대성당]]에서 [[세례|기름부음 의식과의식]]과 대관식을 치른 뒤 한동안 [[로마]]에 머물렀다. 잠시 로마에 머물던 아르눌프는 람베르트를 분쇄하기 위해 [[스폴레토]] 공격을 계획하고, 계속 남부 이탈리아로[[이탈리아]]로 가던중 갑자기 [[중풍]]에 걸려 896년 [[5월]] [[독일]]로 철수 했다. 그해 [[교황 포르모소]]가 죽자 다시 람베르트가[[람베르트 2세]]가 실권을 잡았다. 이때 아르눌프를 지지하던 [[로마 시 원로원]] 의원 콘스탄틴과 스테파누스는 [[바이에른]]으로 망명했다.
 
한편 [[889년]]부터 아르눌프는 자신에게 적자가 태어나지 않을 것을 예상, [[프랑크 왕국의왕국]]의 귀족들에게 [[츠벤티볼트]]와 [[라톨드]]가 자신의 정당한 상속인임을 인정하라고 꾸준히 설득했다. 그것으로 안심이 되지 않았던 아르눌프는 서자 [[츠벤티볼트]]를 [[동프랑크]]의 유력 귀족의 하나인 [[작센]] 공작인 [[광휘공 오토의오토]]의 딸 오다를 로타링기아에서[[로타링기아]]에서 직접 결혼시킨다.
 
==== 병마와 퇴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