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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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초기의 생애 ===
프톨레마이오스의 어머니는 아르시노에로 아버지는 분명하지 않다불명이다. 고대에는당대에는 그의 아버지가 마케도니아의 귀족인 라고스로 묘사되기도 하였으나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필리포스 2세]]의 사생아라는 설도 있다. (이 가설이 맞는다면 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알렉산드로스]]의 배다른 형제가 됨)된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어린 시절부터 마케도니아 궁정에서 알렉산드로스와 함께 교육받았고 두 사람은 매우 절친해졌다.
 
[[기원전 337년]] 필리포스 2세에 의해 그는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추종자들과부하들과 함께 추방을 당했으나 부왕 필리포스가 죽고 이듬해 알렉산드로스가 왕위에 오른 뒤에 다시 마케도니아로 다시 돌아와 알렉산드로스의 부하 장군이 되었다. 그는 알렉산드로스의 절친한 부하이자 친구로서 알렉산드로스의 첫 번째 원정부터 그와 함께 참가하여 수많은 원정에 함께 하였다. 알렉산드로스의 동방원정에 참가하였고 [[기원전 327년]]부터 [[박트리아]]에서 [[인더스 강]]으로 원정하는 중에 수많은 무공을 세우고 마케도니아 함대 사령관이 되었다.
 
[[기원전 324년]]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인 [[수사 (메소포타미아)|수사]]에서에서에서 벌어진시행된 유명한 축제에서 알렉산드로스는 그를 페르시아 출신의 귀족인 아르타카마와 결혼시켰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가 죽자 바빌로니아에서 알렉산드로스의 장군들이 대 제국에 대한 분할을 하였는데 프톨레마이오스는 이집트의 총독으로 리인전한 리비아와 아라비아 지역까지 관장하게 되었다. 얼마기원전 305년 그는 자의적으로 [[키레나이카]]를 병합하였고병합하며 이집트 파라오로 등극하면서 제국의 섭정이던 [[페르디카스]]는 프톨레마이오스를 가장 강력한 라이벌로 생각하게 되었다.
 
=== 디아도코이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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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집트의 통치 ===
안티고노스를 비롯한 [[디아도코이]]들은 이제4개 각기국가로 분할하고 스스로를 왕으로 칭하였다. [[기원전 305년]] 프톨레마이오스도 이집트에서 왕위를공식적으로 파라오로 자청하고등극하면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열었다.
 
[[기원전 302년]] 안티고노스에 대항하는 연합군이 다시 결성되자 프톨레마이오스는 이에 참가하여 시리아로 진격했고 [[기원전 301년]] 〈[[이프소스 전투]]〉에서 [[리시마코스]]와 [[셀레우코스 1세]]가 안티고노스를 격파하자 다시 시리아를 차지했다. 그러나 다른 동맹자들이 시리아에 대해 셀레우코스의 종주권을 인정했기 때문에 남부 시리아 (특히 [[유대]]지방)에 대한 영토권을 두고 [[셀레우코스 왕조]]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사이의 분쟁이 다음 백년간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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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톨레마이오스는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뒤에 자신의 위치를 잘 활용하여 동맹과 연합을 수시로 바꾸면서 전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에 자신의 근거지 이집트를 잘 방어할 수 있었다. 재정문제를 관리하기 위해 당시 이집트에게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던 화폐제도를 도입했고 종교적 관용과 유화정책을 폈다.
 
그는 [[멤피스 (이집트)|멤피스]]에서 이집트와 그리스의 종교를 융합시키는 사라피스 의식을 정례화했으며 페르시아인들에게 파괴당한 파라오의[[이집트 제25왕조]], [[이집트 제28왕조]]의 파라오 신전들을 복구했고, 학자들과 신관들이 연구하고 활동하는 무제이온을 세우고 유명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알렉산드리아의 등대]]도 건립했다. 그는 예술과 학문의 후원자였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역사가, 작가로 활동했다. 비록 지금은 전해지지 않지만 알렉산드로스의 동방원정에 대한 역사책을 썼다고 전해진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생전에 일종의 신격에 이른 사람으로 찬양받았으며 죽은 뒤에는 거의 대부분 이집트인들로부터 신과 같은 존재로 추앙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