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소 (후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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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참전 전투/전쟁 =[[십상시의 난]],<br />[[동탁 토벌전]],<br />[[관도대전]]
}}
'''원소'''(袁紹, 미상 ~ [[202년]] [[6월 28일]]([[음력 5월 21일]]))는 [[후한]] 말기의 군인으로, [[자 (이름)|자]]는''' 본초'''(本初)이며 [[여남군]] 여양현(汝陽縣) 사람이다. 명문가의 사생아 출신으로 젊어서는 [[청류파]] 사상가로 명성을 떨쳤다. 후한의 정치적 부패를 타파하고자 [[십상시]]를 일소하였으나, [[동탁]]의 개입으로 정권을 잡는 데 실패하고 중앙에서 쫓겨났다. 원래는 중앙에서 태어난 관료 출신이었지만 사상가·정치가로서의 명망과 경력을 바탕으로 [[기주]] 일대에서 빠르게 군벌화하였고, [[한복 (후한)|한복]]·[[공손찬]]·[[장연 (후한 무장)|장연]]·[[전해]]·[[공융]] 등의 정부 관료·군벌들을 격파·병합함으로써 가장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였으나 [[조조]]에게 패한 뒤([[관도대전]]) 202년에 병으로 죽었다. 후계자 [[원상 (후한)|원상]]은 종형 [[원담]]의 반발로 내전이 일어난 사이에 조조에게 토벌되었다.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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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벌로서의 활약===
초평 2년([[191년|191]]), [[공손찬]]이 [[동탁]] 토벌을 명분으로 [[한복 (후한)|한복]]이 지배하는 기주를 침공해 [[한복 (후한)|한복]]을 격파했다. 이때 원소는 기주목이었던 [[한복 (후한)|한복]]에게 부득이하게 종속되어 견제, 감시를 받는 입장에 있었으나 배후에서 [[공손찬]]의 기주 공격을 조장한 흑막의 장본인이기도 했다. [[한복 (후한)|한복]]이 패배하여 지배력이 약해진 틈을 타 영내에선 반란이 일어났고, 흑산적(黑山賊) [[장연 (후한 무장)|장연]]을 비롯해 [[어부라]](於夫羅)·[[장양 (치숙)|장양]](張楊) 등의 군벌이 기주를 넘보았는데 원소는 이들을 모두 격파하였으며 패퇴한 [[장양 (치숙)|장양]]·[[어부라]]는 원소에게 항복했다. 이로 인해 기주 내에서 위세를 얻은 원소는 이를 바탕으로 [[한복 (후한)|한복]]을 설득하며 또한 협박했다. 겁에 질린 [[한복 (후한)|한복]]은 결국 원소에게 기주목의 자리를 양도한다.
초평 2년([[191년|191]]), [[공손찬]]이 [[동탁]] 토벌을 명분으로 [[한복 (후한)|한복]]이 지배하는 기주를 침공해 [[한복 (후한)|한복]]을 격파했다.
이때 원소는 기주목이었던 [[한복 (후한)|한복]]에게 부득이하게 종속되어 견제, 감시를 받는 입장에 있었으나 배후에서 [[공손찬]]의 기주 공격을 조장한 흑막의 장본인이기도 했다. [[한복 (후한)|한복]]이 패배하여 지배력이 약해진 틈을 타 영내에선 반란이 일어났고, 흑산적(黑山賊) [[장연 (후한)|장연]]을 비롯해 [[어부라]](於夫羅)·[[장양 (치숙)|장양]](張楊) 등의 군벌이 기주를 넘보았는데 원소는 이들을 모두 격파하였으며 패퇴한 [[장양 (치숙)|장양]]·[[어부라]]는 원소에게 항복했다. 이로 인해 기주 내에서 위세를 얻은 원소는 이를 바탕으로 [[한복 (후한)|한복]]을 설득하며 또한 협박했다. 겁에 질린 [[한복 (후한)|한복]]은 결국 원소에게 기주목의 자리를 양도한다.
 
원소가 [[한복 (후한)|한복]]을 협박하여 기주를 빼앗는 데 이용당한 셈이 된 [[공손찬]]은 원소와 대립하고 있던 사촌동생 [[공손월]](公孫越)을 파견하여 [[원술]]과 우호관계를 맺었다. [[원술]]은 [[손견]](孫堅)과 [[공손월]]을 파견해 원소의 간접적인 세력권 내에 있던 양성을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패배했을 뿐만 아니라 [[공손월]]은 날아온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이에 [[공손찬]]은 더욱 대노하여 원소를 칠 것을 다짐하고 반하(磐河)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당시 [[공손찬]]은 하북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형성한 군벌이었으므로 원소는 직접 대결을 피하고 발해태수의 직위를 [[공손찬]]의 종제 [[공손범]](公孫範)에게 양도하면서 [[공손찬]]을 회유하려 하였으나, [[공손찬]]은 청주(靑州)·서주(徐州) 일대까지 세력을 확대하여 더욱 강성해졌고, 마침내 기주를 공격했다(192년 1월). 이때 [[공손찬]]의 무시무시한 위세에 하북 전체가 흔들렸으며 기주의 수많은 성읍들이 [[공손찬]]에게 투항하였다고 한다. 이를 좌시할 수 없었던 원소는 마침내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나와 [[공손찬]]과 일전을 벌인다. 당시 막 출범한 신생세력에 지나지 않았던 원소는 [[공손찬]]에 비해 군대의 수와 장비, 훈련도 등 여러 면에서 압도적으로 불리하였으나 반하, 계교에서 거듭 벌어진 회전에서 [[공손찬]]을 크게 격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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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손찬]]은 비록 계교 전투에서 대패하였으나 이후에도 거듭 군사를 일으켜 원소를 공격하였다. 전투는 여러 곳에서 한동안 계속되었는데, 마침내 원소와 [[공손찬]]은 평원군 일대에서 다시 만나 회전을 벌였고, 여기서 [[공손찬]]은 또다시 원소에게 대패하였다. 다급해진 [[공손찬]]은 초평 4년([[193년]]) 초에 원소와 화친을 맺었다.
 
초평 4년([[193년|193]]), 흑산적의 총수 [[장연 (후한 무장)|장연]]은 원소와 [[공손찬]]이 싸우는 틈을 타 원소의 근거지인 [[업 (지명)|업]](鄴)을 습격하여 위군태수(魏郡太守) [[율성]](栗成)을 죽였다. 이때 원소군의 수뇌부는 [[공손찬]]을 격파하고 화친을 맺어 박락진(博洛津)에서 전쟁이 끝난 것을 축하하는 연회를 열고 있었는데, 업이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받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경악하였고 혼란에 빠졌으나 원소는 평소의 모습을 전혀 잃지 않고 태연자약하게 행동하였다. 혼란을 수습한 원소는 업으로 진격하였고, 창암곡(蒼巖谷)에서 흑산적 두목 우독(于毒)과 장안에서 임명한 기주목 호수(壺壽)를 격파하고 1만 명을 참하였으며, 녹장산(鹿場山)에서 좌자장팔(左髭丈八)의 군대를 전멸시켰다. 또한 다시 청우각(靑牛角)·이대목(李大目)·황룡(黃龍)·좌교(左校)·유석(劉石)·우저근(于氐根) 등을 공격하여 대파하고 수만 명의 수급을 얻었다. 업은 3개월 만에 수복되었으며, 이후 흑산적과 교전을 거듭하여 이듬해에는 상산(常山)에서 [[장연 (후한 무장)|장연]]까지 격파하였다. [[장연 (후한 무장)|장연]]은 상산전투 이후에도 원소의 집요한 군사·외교적인 공격을 받아 점차 몰락한 것으로 보인다.
 
[[공손찬]]은 화친을 맺고 후퇴하였으나 장연의 공격으로 원소가 위기에 몰리자 곧 이를 파기하고 다시 원소를 공격하였다. 하지만 [[공손찬]]은 이 무렵부터 평소의 과격하고 잔인한 성품이 더욱 두드러지고 명망 높은 황족 [[유우 (후한)|유우]]를 죽인 일로 인해 신망을 완전히 잃었으며 내부 문제에 시달렸으므로 더이상 대대적인 공세를 취하지 못하였다. [[장연 (후한 무장)|장연]]과의 싸움을 끝낸 원소는 [[유우 (후한)|유우]]의 아들 [[유화 (후한)|유화]](劉和)를 앞세워 [[공손찬]]에게 공세를 펼치기 시작하였는데, [[공손찬]]의 악정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열광적으로 이를 맞이하였다. 또한 원소는 [[오환]](烏丸)·[[선비족|선비]](鮮卑)·[[흉노]](匈奴)를 비롯한 북방의 기마민족들에게 우호적인 자세로 유화책을 펼쳤고, 평소 [[공손찬]]의 강경책에 시달려 오던 이들도 원소에게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공손찬]]을 공격했다.
 
[[흥평]](興平) 2년([[195년|195]]), 포구에서 원소군과 전투를 벌인 [[공손찬]]은 참패하여 수만 명의 군사를 잃었고, 각지의 반란으로 인해 그 위세가 극도로 약해져 몰락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공손찬]]은 역경(易京)에 요새를 짓고 수비에 전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