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보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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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건의 난 진압 ==
황보숭은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 되기 위해 학문과 무예를 함께 익혔다. 처음에 [[효렴(孝廉)]]으로 추천되어 관직에 나아갔으나 부친상을 당하는 바람에 관직을 떠났다. 상을 치른 후 복귀해 의랑(議郎), [[북지군|북지(北地)]][[태수]] 등을 지냈다.
 
[[184년]] [[장각]](張角)이 [[황건의 난]]을 일으키자, [[당고의 금]]으로 인해 쫓겨난 사람들을 등용하고 궁중에서 관리하는 말을 황건적 진압에 써야 한다고 하였다. 중상시(中常侍) 여강(呂)도 황보숭과 의견을 같이했기에 [[후한 영제|영제]](靈帝)는 황보숭을 좌중랑장(左中郎將)으로 삼고 [[노식]](盧植), ·[[주준]](朱儁)과 함께 황건적을 토벌하도록 했다.
 
황보숭은 주준과 함께 영천[[영천군 (潁川중국)|영천]]의 황건적을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영천의 황건적을 이끌던 장수 [[파재]](波才)는 주준의 군사를 물리치고 장사(長社)에 있던 황보숭의 진영을 포위하였다. 그러나 황보숭이 화공으로 황건적을 공격했으며, 장사성에서도 자신의 공격에 호응하게 하자 황건적은 혼란에 빠졌다. 이 날은 바람이 거세게 불은데다 전투 중에 [[조조]](曹操)가 도착하여 협공한 덕분에 대승을 거두었다. 이 공으로 황보숭은 도향후(都鄕侯)에 봉해졌다.
 
이후 양책(陽翟)으로 달아난 파재와 싸워 승리하고 서화(西華)를 되찾았다. 조정에서 황보숭으로 하여금 [[동군(東郡)]]을 공격하게 하고 주준에게 완성(宛城)의 황건적을 공격하게 하여 이때부터 독자적으로 싸우게 되었다. 이후 8월에 창정(蒼亭)에서 황건적의 장수 복사(卜巳)를 사로잡았다.
 
한편 장각의 본진과 싸우던 노식은 연승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좌풍(左豊)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 벼슬에서 쫓겨났으며, 그 뒤를 이은 [[동탁]](董卓)은 별다른 전과를 거두지 못했다. 황보숭은 조정의 명령에 의해 동탁을 대신하여 장각의 본진을 상대하게 되었다.
 
10월에 황건적 진영을 야습하여 3만 명을 베고 장각의 동생인 [[장량 (후한)|장량]](張梁)을 죽였다. 승리 후 장각이 이미 죽었다는 걸 알고 시체의 목을 베어 [[뤄양|낙양]]으로 보냈다. 황보숭은 계속 추격하여 11월에는 하곡양(下曲陽)에서 [[장보 (후한)|장보]](張寶)를 죽이고 대승을 거두었다. 이 공으로 기주목[[기주]][[자사 (관직)|목]][[거기장군|좌거기장군]](左車騎將軍)이 되었으며, 괴리후(槐里侯)로 봉해지고 식읍 8천 호를 받았다.<ref>皇甫嵩朱儁 열전</ref> 그러나 황건적 토벌 중 [[장양 (후한)|장양]]의 뇌물 요구를 거절하고 [[조충 (후한)|조충]]이 법을 어긴 큰 집을 지은 것을 고발하는 상소를 올렸기 때문에, [[185년]] 둘의 모함을 받아 좌거기장군 벼슬을 박탈당하고(음력 7월) 식읍 6천 호가 깎였다.<ref>《[[후한서]]》 〈[[:s:zh:後漢書/卷8|제8권]]〉 “秋七月,[...]左車騎將軍皇甫嵩免。”</ref>
그러나 황건적 토벌 중 [[장양 (후한)|장양]](張讓)의 뇌물 요구를 거절하고 [[조충 (후한)|조충]](趙忠)이 법을 어긴 큰 집을 지은 것을 고발하는 상소를 올렸기 때문에, [[185년]] 둘의 모함을 받아 좌거기장군 벼슬을 박탈당하고(음력 7월) 식읍 6천 호가 깎였다.<ref>《[[후한서]]》 〈[[:s:zh:後漢書/卷8|제8권]]〉 “秋七月,[...]左車騎將軍皇甫嵩免。”</ref>
 
==변장ㆍ한수의 난 진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