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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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Bronze-age-collapse.svg|thumb|right|300px|[[청동기 시대 붕괴기]](Bronze Age collapse): 1206~1150 BC)의 [[고대 근동]]과 고대 그리스 (지도의 지명은 [[노르웨이어]]로 되어 있다)]]
 
[[청동기 시대]] 중기(대략 기원전 2000년경)<ref>찰스 로완 베예(Beye, Charles Rowan), 《고대 그리스의 문학과 사회》("Ancient Greek Literature and Society"), 가든 시티(Garden City), 뉴욕(N.Y.) : 앵커 프레스(Anchor Press), 1975. (Cf. p.1) {{ISBN |0-385-06443-8}}. 2nd ed., rev., Ithaca : 코넬대학교 출판부(Cornell University Press), 1987. {{ISBN |0-8014-1874-7}}. "We know very little about the period between the Greeks' arrival in their historic land and the beginnings of their recorded history in the eighth and seventh centuries B.C. They seem to have entered what is now called Greece toward the end of the third millennium, coming down out of the Balkan peninsula from present-day [[Albania]] and [[Yugoslavia]]".</ref>부터 [[발칸 반도]]에서 나중에 그리스인을 이루게 될 부족들이 몇 차례에 걸쳐 남쪽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원시 그리스어]]는 이 시기 이주민들이 오기 직전에 쓰인 언어로, 기원전 3000년대 후반 또는 늦어도 기원전 17세기에 쓰인 것으로 보인다. 원시 그리스의 청동기 문명은 보통 '헬라딕(helladic)' 문명이라고 칭하며, 흔히 말하는 "고대 그리스" 시대의 이전 단계이다.
 
소위 [[미케네 문명]]이 이 시기에 흥성하였으며,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 기록되어 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미케네 문명]]은 기원전 1150년 갑자기 몰락하였는데, 도시는 약탈당하고 인구가 크게 줄었다. [[청동기 시대의 붕괴]]는 그리스 본토에 침입한 마지막 그리스인 집단인 도리스인의 출현과 거의 같은 시기에 일어났다. 두 사건이 인과적으로 연결된다는 견해가 다수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청동기 시대가 종식되면서 그리스는 "암흑기"에 접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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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르타]]는 정복을 통해 성장하였다. [[도리스인]]이 남하하였을 때, 원주민 가운데 스파르타의 지배를 받아들이고 종속적인 지위를 감수한 자는 운신은 자유롭되 시민권이 없는 [[페리오이코이]]가 되고 처음부터 예속신분이었거나 끝끝내 저항한 자는 [[헤일로타이]]라는 노예신분이 되었다.
 
기원전 8세기 중후반 [[스파르타]]에서는 [[메세니아 전쟁|전쟁]]을 일으켜 [[메세니아]]를 정복하고 주민을 농노(헤일로타이)로 삼았는데, 이러한 행위는 고대 그리스에서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스파르타의 예속 관습으로 반란의 위험이 생겼다.<ref>Holland T. Persian Fire p69-70. {{ISBN |978-0-349-11717-1}}</ref> 스파르타 시민보다 훨씬 수가 많던 '헤일로타이'라는 이들 예속민은 스파르타를 위해 농사를 짓고 일하며 스파르타 시민과 국가가 요구하는 공납을 바쳐야 하였다. 메세니아 전쟁 뒤 스파르타는 예속민의 토지를 시민에게 평등한 수입을 얻을 수 있도록 분배하였다. 그 대신 스파르타의 성인 남성들은 병사가 되어 늘 전쟁에 대비하였다. 상류층도 병사로 훈육받으며 살아야했으므로, 부자와 빈민이 모두 평등하여 시민의 결속을 강화할 수 있었다. 이러한 개혁은 기원전 9세기에 전설상의 [[뤼쿠르고스]](Λυκοῦργος)가 제정하였다고 하나, 사실 [[메세니아 전쟁]]에 이르는 역사적 발전의 소산으로, 기원전 650년에 완료된 것으로 보인다.
 
[[스파르타]]의 국제는 두 사람의 왕이 있었으나 실권은 없고 두 왕을 포함하여 30명의 유명 가문 출신으로 구성되는 장로회가 국정의 중요 안건을 마련하지만 이는 20세 이상의 성년남자 시민전체로 구성되는 민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국정운영의 실권은 집정관(Ἔφορος)이 가졌는데, 이들은 또 왕을 포함한 여러 관직자들의 행동을 감시하고 스파르타 특유의 생활양식의 준수 여부를 감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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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 후반에 [[아테나이]]는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와 아들 [[히피아스]]와 [[히파르코스]]의 지배를 받았다. '참주'라는 말은 그리스어 '튀란노스'(τ?ραννο?, "적법하지 않은 통치자")에서 나온 말로, 원래 멸칭은 아니었으나, 선한 통치자건 악한 통치자건 모두에게 쓰였다.<ref>{{웹 인용|url=http://www.etymonline.com/index.php?term=tyrant |제목=Online Etymology Dictionary |출판사=Etymonline.com |확인일자=2009-01-06}}</ref><ref>{{웹 인용|url=http://dictionary.reference.com/browse/tyrant |제목=tyrant—Definitions from Dictionary.com |출판사=Dictionary.reference.com |확인일자=2009-01-06}}</ref>
 
[[아테나이]]는 최초의 대외 전쟁인 [[살라미스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이 전쟁의 지도자였던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tos)는 기원전 561년에 평민층의 지지를 바탕으로 참주가 되었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그에 반대하는 귀족을 추방하고 그 토지를 빈농에게 분배하고 상공업을 장려하고 은광을 개발하여 시민의 세금 부담을 감소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매우 과감한 것으로서 귀족세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그러나 기원전 510년 아테나이의 귀족 [[클레이스테네스]]의 선동으로 스파르타 임금 [[클레오메네스 1세]]가 아테나이 사람들을 도와 참주를 전복시켰다. 그 뒤 클레오메네스 1세가 親스파르타파의 [[이사고라스]]를 집정관으로 세우자 두 나라는 서로 싸우게 되었다. 아테나이가 스파르타의 괴뢰 국가가 되지 않도록 클레이스테네스는 아테나이 시민에게 모든 시민이 지위에 상관없이 정치적 권력을 공유하는 혁신을 제안하여, 아테나이는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다. 그리하여 이사고라스를 물리치고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을 시행한 아테나이 사람들은 수이 스파르타가 이사고라스를 다시 세우고자 세 번에 걸쳐 감행한 침입을 물리칠 수 있었다.<ref>Holland T. Persian Fire p131-138. {{ISBN |978-0-349-11717-1}}</ref> 민주주의가 등장하여 아테나이의 병폐를 고쳤으며, 아테나이의 '황금 시대'를 열었다.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 정착 과정은 다음과 같다. 솔론은 재산 정도에 따라 참정권을 부여하였다. 그는 시민 계층을 재산 정도에 따라 500석 급, 기사급, 농민급, 노동자급 등 네 가지로 분류했는데 계층에 따라 맡을 수 있는 공직의 지위는 달라졌다. 노동자급은 공직에는 참여할 수 없었지만, 시민 의회에는 참여할 수 있었다. 클레이스테네스는 정치 참여 자격에서 재산 기준을 폐지했고, 독재자의 추방을 막는 도편추방제(Ostracism)를 실시했다. 페리클레스는 시민 의회의 지위를 높이고, 투표에 참여하는 계층을 확대함으로서 민회 중심의 직접 민주주의를 정착시켰다. 또한 관리를 추첨으로 선발하고 수당을 지급함으로서 시민의 정치 권리 행사를 확대시키고, 가난한 시민도 정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