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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기 가야 연맹 ===
[[전기 가야 연맹]]은 [[42년]]부터 [[400년]], [[고구려]]의 [[광개토왕]]의 공격을 받아서 무너지지 전까지 [[358]]년 동안 지속된 연맹이다. 탈해세력을 격퇴하는 것으로 기반이 공고해진 수로왕의 가락국은 그 후 나머지 변한제국(弁韓諸國)을 결집해 그 맹주자리에 오르는 한편 해상무역을 기반으로 곧 동아시아 해상무역의 허브로 발전해 번영을 구가하기 시작했다. 금관가야에서 생산된 [[철]]은 [[삼한|한]], [[예맥|예]], [[왜]], [[낙랑군]], [[대방군]]에 공급되었다.<ref>{{서적 인용 |제목= 유물로 읽는 우리 역사 | 저자= [[이덕일]] |연도= 1999 |출판사=세종서적 |쪽= 18 |id={{ISBN |8984070203 }}|인용문= 서기 3세기 경의 정황을 전해주는 『삼국지』위서 동이전 한(韓)조에는 이런 기록이 나온다. "국(國)에서 철을 생산하는데 한, 예, 왜가 모두 와서 철을 얻어간다. 장사지낼때에는 철을 사용하는데 이는 마치 중국에서 돈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 또 철을 두 군(낙랑군․대방군)에 공급한다." 여기서 '국(國)'이 어디를 뜻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문맥상 가야가 위치했던 변한일 가능성이 높다. 그 중에서도 김해의 구야국(가락국)이 가장 유력한 후보이다. }}</ref><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지]] | 저자= [[진수 (서진)|진수]] |연도= 3세기 |장= [[:zh:s:三國志/卷30|三國志 卷30 烏丸鮮卑東夷傳]] |인용문= 國出鐵,韓、濊、倭皆從取之。諸巿買皆用鐵,如中國用錢,又以供給二郡。}}</ref> 구야국에서는 많은 양의 철이 산출되었고 이로 인해 시스템화된 제철공업이 발전해 철정(鐵鋌)으로 규격화된 철상품이 일본과 중국으로 수출되었고 한동안 가락국의 철은 동북아의 철 시장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다시피하게 되었다. 철이라는 상품으로 해외시장을 개척한 가락국은 이어서 중국과 한반도, 일본열도를 잇는 무역네트워크를 구성하기 시작했다. 중국의 선진문물이 구야국에서 일단 도착한 뒤 일본에서 수입된 원자재 및 낙동강 수로를 통해 집적된 변한의 물품과 교환되었고 그렇게 입수된 선진문물은 다시 한반도 내륙과 일본열도로 전해졌던 것이다.
 
조선 초기 김해도호부(金海都護府)의 인구는 속현인 [[웅천현|웅신현]](熊神縣)의 인구까지 포함해 7~8천명이었다. 3세기 경의 가락국의 인구는 김해도호부의 3배가 넘는 2만 5천명이었다. 이는 [[삼국지]] 위지동이전의 인구규모로 본 삼한소국의 분류에 따르면 대국(大國)에 속했다. 이런 해상무역을 통한 부의 축적은 가락국을 변한제국내에서 맹주로서의 지위를 공고하게 해주었지만 한편으로 이에서 소외된 변한제국의 시기와 질투를 유발했다. 3세기 초입에 가락국에 눌려 해상무역에서 명함조차 내밀지 못하고 있던 변한 남해안의 7개국과 역시 가락국으로 인해 해상무역에서 힘을 못쓰고 있던 전남의 [[침미다례]]세력의 중심인 보라국(保羅國)<ref>나주</ref> 이 연합해 [[포상팔국]]을 형성했고 곧이어 그 포상팔국이 해상무역권을 빼앗기 위해 가락국과 가야전체에 대항해 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209년]]에 포상팔국은 가락국과 가야의 두 번째 중심국이었던 [[안라국]]을 침공했고 중과부적으로 패했던 가락국은 당시에 유력한 적국(敵國)이었던 신라에 구원을 요청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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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오늘날, 경남 [[김해시]]인 이곳은 금관가야가 존재했을 당시에는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바다나 갯벌이었다. 일제강점기인 20세기 초 [[낙동강]] 제방공사로 인해 평야지대로 탈바꿈하였지만, 그 이전까지는 낙동강의 본류가 지금처럼 구포 방면으로 흐른 것이 아니라 선암다리 밑으로 흐르고 있었다. 부분적으로 수몰되지 않은 얕은 구릉에서는 어김없이 조개무지인 패총(貝塚)이 나오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ref>{{서적 인용 |제목= 유물로 읽는 우리 역사 | 저자= [[이덕일]] |연도= 1999 |출판사=세종서적 |쪽= 17~18 |id={{ISBN |8984070203 }}|인용문= 오늘날 우리가 김해평야로 부르고 있는 이곳은 옛날 가락국이 존재했을 당시에는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바다나 갯벌이었다. 일제 시대인 20세기 초 낙동강 제방공사로 인해 평야지대로 탈바꿈하였지만, 그 이전까지는 낙동강의 본류가 지금처럼 구포 방면으로 흐른 것이 아니라 선암다리 밑으로 흐르고 있었다. 부분적으로 수몰되지 않은 얕은 구릉에서는 어김없이 조개무지인 패총(貝塚)이 나오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ref>
 
== 산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