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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우'''(項羽, [[기원전 232년]] ~ [[기원전 202년]])는 중국 [[진 (영성)|진나라]] 말기의 군인이자, 초한전쟁 때 초나라의 군주로, '''우'''는 [[자 (이름)|자]]이며, 이름은 '''적'''(籍)이다. [[초 (춘추 전국)|초나라]]의 명장 [[항연]](項燕)의 후손으로, 처음에는 숙부 [[항량]]을 따르며 [[진 삼세황제|진왕 자영]]을 폐위시켜 주살한 후로 '''서초 패왕'''(西楚 覇王)에 즉위함으로써 왕이 되었고, [[초 의제]]를 [[섭정]]으로 도와 통치했으나, 그를 암살했다. 뒷날 [[전한 고조|유방]]의 도전으로 초한의 끝없는 싸움을 싸우다 패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죽음은 [[중국]] 위진남북조 시대 이후 문학의 소재로 활용되기 시작했고, [[원나라]] 이후 희극의 주인공으로도 등장하였으며, [[고려]]시대 이후의 문학에도 등장한다. 또한 무속의 신의 한 명으로도 숭배된다. [[장기]]에서 초나라의 왕은 항우를 상징하는 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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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까지 진나라에 항거한 초나라 명장 [[항연]]의 손자로 조부가 죽고 [[초 (춘추 전국)|초나라]]가 멸망하자 숙부 [[항량]](項梁)과 함께 회계의 오중으로 숨어, 숙부 항량의 손에 자랐다. [[진승]](陳勝), [[오광]](吳廣)의 난이 일어나고 진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숙부 항량과 함께 봉기하여 회계군수 은통을 참살한 뒤, 8천여 군사를 이끌고 차례로 주변 세력을 병합하였다.
 
후에 양부나 다름없던 숙부 항량이 진의 장한의 계책에 죽자 격분하여 스스로 상장군이라 칭한 뒤 [[하북]](河北)에서 [[장한]](章邯)을 항복시키고 도처에서 진나라군을 무찔러 진의 세력을 소탕하였다. 허나 이 기간동안 패현의 [[유방]](劉邦)이 함양에 먼저 입성하여 함양왕이 되려하자 서둘러 함곡관을 향해 진군하였다. 유방이 함곡관에서 자신을 막고 항거하려는 움직임이 있자 유방을 죽이려 하였으나 유방이 지레 겁을 먹어 함곡관 문을 열고 항복하였다. 이에 항우는 유방을 홍문에 불려내 범증의 말처럼 죽이려 하였으나, 장량의 계책에 빠져 결국 죽이지 못하고 유방의 항복을 받은 후 유방을 풀어줬다. 이후 항우는 함양성에 입궁하여 [[진 삼세황제|진왕 자영]](秦王 子嬰)을 죽이고 도성 함양에 아방궁과 일부 건물을 불사른 뒤에 [[금의환향]](錦衣還鄕: 금의환향의 고사도 항우에게서 태어났다)의 명목으로 [[팽성]](彭城)에 도읍한 후 서초 패왕이라 칭하였다. 본래 자신이 숙부 항량과 함께 세웠던 초나라의 [[초 의제|의제]]를 [[기원전 206년]]에 암살했다. 이는 뒷날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의 모델이 되었고, 한편 [[전한 고제|유방]]으로 하여금 찬탈자를 친다는 명목으로 거병하는 원인을 제공했다.
 
파촉을 제외한 전통적인 진나라 지역은 셋으로 나누어 [[장한]], [[사마흔]], [[동예 (진나라)|동예]]를 왕으로 삼고 지키게 했을 뿐이었다. 이에 소하의 천거로 대장이 된 [[한신 (전한)|한신]]은 삼진을 속전속결로 격파하고 패왕이 미처 원군을 보내기도 전에 함양성을 점령한다. 패왕은 그제서야 한왕 유방을 치려 했으나, 다시 한번 [[장량]](張良)의 농간에 빠져 한을 치는 일은 다음으로 미루고 대나라 왕을 일컫는 [[진여 (사람)|진여]]와 제나라의 반란을 진압하러 갔다. 이는 한왕으로 하여금 중원으로 더욱 더 진출을 할 수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