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송 효종: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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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나라의 유력자들은 속속 완안옹의 곁으로 모이게 되었고, 해릉왕은 군중에서 살해되었다. 완안옹은 금나라의 5대 황제 [[금 세종|세종]]이 되어 송나라와 화평을 맺었다. 같은 해 고종은 퇴위하여 태상황이 되고, 양자인 조신이 즉위하여 효종이 되었다. 금의 세종, 남송의 효종은 각자가 속한 왕조에서 가장 최고의 명군으로 불렸던 인물들이었는데, 우연하게도 동시대에 2명의 명군이 남쪽과 북쪽에 나타나게 되어 평화가 찾아오게 되었다.
 
효종은 본래 성격이 강하고 용맹했으며 끊임없이 금나라 정벌을 꿈꾸는 인물이었다.<ref>청위, 장허성, 《중국을 말한다 11》, 이원길 역, 신원문화사, 2008, p.232, {{ISBN |978-89-359-1450-0}}</ref> 그는 금과의 화친을 주장한 [[진회 (남송)|진회]]의 측근들을 쫓아내는 한편 금에 저항하다 억울한 죽음을 맞은 [[악비]]를 신원시켜 백성들의 민심을 얻었다.<ref>셰가오더, 《수완》, 류방승 역, 아라크네, 2007, p.336, {{ISBN |978-89-92449-13-7}}</ref> 그러나 효종은 재위 기간 내내 24년간 태상황으로서 군림하며 조정일에 끊임없이 관여하는 고종의 권력에 눌려 지냈고, 양자라는 입장상 그에게 반발하지 못하고 오로지 행동을 삼가며 고종을 극진히 모셨다.<ref>청위, 장허성, p.232</ref> 악비가 세상을 떠난것을 굉장히 아쉬워했다. 효종 본인부터가 주전파인데다가 장군들도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악비를 모함한 진회일가를 미워했다. 악비의 시신을 거둔 사람에게 상을 주고 악비의 무덤을 크게 지어주었으며 충무라는 시호를 내리고 그앞에 무릎을 꿇은 진회일가의 동상을 세웠다. 그리고 악비와 같은 충직한 신하가 나에게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한탄했다. 효종은 불필요한 관리의 숫자를 줄이고, 당시 남발기미가 보이던 회자(會子;지폐)의 절제 및 농촌의 체력 회복, 강남 경제의 활성화 등 여러가지 개혁을 추진해 남송은 번영을 구가하게 되었다.
 
효종은 자신을 닮은 셋째아들 조돈(趙惇)을 총애하였는데 병약했던 장남 장문태자가 요절하자 차남인 위혜헌왕을 뛰어넘어 조돈을 태자로 삼았다.<ref name="china11">청위, 장허성, p.273</ref> 그로부터 17년 뒤인 [[1189년]] 효종은 퇴위하여 상황이 되었고, 조돈은 즉위하여 [[남송 광종|광종]]이 되었다. 효종은 거처를 고종이 지내던 덕수궁으로 옮겨 이름을 중화궁으로 고쳤다.<ref>청위, 장허성, p.247</ref> 효종은 동생에게 제위를 빼앗기고 외지에서 홧병이 나 죽은 둘째아들을 가엾게 여겨 그 아들을 태자로 삼고 싶어했는데 이로 인해 부자지간이 틀어지게 되었다.<ref name="china11"/> 광종은 점차 효종의 거처인 중화궁에 문안을 오지 않게 되었고 효종은 아들을 그리워하다가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