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Choboty (토론 | 기여)
잔글 영어판 분류 정보를 이용.+분류:나폴리 대학교 동문; 예쁘게 바꿈
Metrobot (토론 | 기여)
잔글 ISBN 매직 링크 제거
24번째 줄:
부친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알폰소 리구오리는 1723년 법률가를 그만두고 [[성 필립보 네리]]가 세운 오라토리오회에 입회하여 성직자가 되기 위하여 신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1726년 12월 21일 그는 30세의 나이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사제가 된 그는 처음 1년간은 집도 없이 떠돌며 사회로부터 소외받고 있던 청소년들을 돌보는 일을 하였다. 그는 청소년들이 직접 운영하는 기도 모임을 만들었다. 기도 모임은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기도와 강론, 사회활동, 교육 등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알폰소 리구오리가 사망한 당시에는 이러한 모임이 72개나 되었으며, 1만 명이 넘는 사람이 참여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알폰소 리구오리의 강론은 신앙을 멀리 하고 사회로부터 소외받고 있던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데 탁월한 효과를 보였다.
 
스스로에게 엄격했던 알폰소 리구오리는 살아가면서 자주 죄책감에 시달렸는데, 특히 도덕적인 죄와 관련해서 사소한 문제에 대해서도 심하게 가책을 느끼며 슬퍼하였다.<ref>''Selected writings'' by Saint Alfonso Maria de' Liguori, 1999 {{ISBN |0-8091-3771-2}} page 209</ref> 하지만 동시에 그는 이러한 양심의 가책을 축복으로 보기도 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양심의 가책은 곧 회개의 시작이다. 그리하여 영혼을 정화시키고 사려 깊은 성격으로 만든다.”<ref>''The true spouse of Jesus Christ: The complete works of Saint Alphonsus de Liguori'' 1929 by Redemptorist fathers Press, ASIN B00085J4WM page 545</ref>
 
1729년 알폰소 리구오리는 집을 떠나 나폴리에 있는 중국어 대학교에 거주하였다. 그곳은 유달리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이 많았던 나폴리 왕국의 내륙 지역으로서 그가 처음으로 전교 활동을 시작했던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