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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eijiza, Keijo, 1938.jpg|썸네일|280px|인파가 몰린 1938년의 명치좌]]
[[파일:National Theater Company of Korea, MyeongDong Theater.jpg|썸네일|280px|현재 [[국립극단]]의 명동예술극장으로 쓰이고 있다.]]
'''명치좌'''(明治座, {{llang|ja-y|明治座|めいじざ|메이지자}})는 일제 강점기 조선의 영화관이자 극장이다.
 
1936년 10월 7일 일본이 통치하는 조선 경성부 메이지마치 잇초메 (현재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1가)에 준공하여 개관한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1946년 1월에 '''국제극장'''으로 개칭되었고, 1947년 12월에는 '''시공관'''(市公館)으로 개칭하고 영화관 및 극장으로 사용되었다. 1957년 6월 1일, '''명동예술회관'''으로 개칭하였으며, 국립극장이 되었다. 1973년 폐쇄 이후 36년을 거쳐 2009년 6월 5일 '''[[명동예술극장]]'''으로 다시 개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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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치좌는 8·15해방 후 미 군정청 시대가 되며 국제극장이란 이름으로 재개관됐다. 명동 1-65번지에 또 다른 명동극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국제극장은 서울시에 의해 접수되어 시공관(市公館)이란 이름으로 바뀌고 집회시설로 쓰이거나 연극 등의 공연을 했다.
 
시공관은 6·25 동란으로 황폐해져 52년 개수되었다. 57년 6월1일, 시공관은 다시 명동예술회관이란 이름으로 바뀌며 국립극장이 되었다. 61년 건물이 개·보수되면서 옥상 일부분을 증축, 지붕 처마선을 복잡하게 만들어 놓았다. 명동예술회관은 62년 3월21일 명동 국립극장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바뀌었고 1973년 9월에 국립극장으로서 연극 오페라 무용 등의 다양한 공연이 열리게 된다. 73년 10월17일 남산 국립극장이 개관될 때까지 10여년간 국립극장으로 역할 했다. 그 후 명동예술회관은 폐쇄되고 75년에는 대한투자금융(현 대한종합금융)에 매각되어 금융업체 건물로 변질되었다. 85년 12월 내부를 전면 개수, 대한종합금융에서 사용하게 되었고 이어 헐릴 위기까지 있었다. 94년 명동 상가번영회가 시민 서명운동을 벌이며 복원운동을 시작했고 99년 대한투자금융이 영업인가 취소가 되면서 법원경매에 부쳐지자 문화관광부가 2002년 8월 23일 결단을 내려 명동 국립극장으로 개수하기로 결정했다. 2004년에 문화관광부가 400억원에 건물과 땅을 사들여 2009년 6월 5일<명동예술극장>으로 재개관했다. 현재 명동 예술극장은 연극 전문 공연장이 되었다. <ref> 이근혜,<<일제강점기 근대 문화 공간 표현 특성에 관한 연구>> 경원대학교 일반대학원, 2008, p89-93</ref><ref>김정동,<<국민일보>>2009-03-02</ref><ref>[https://www.youtube.com/watch?v=KGIpbtgQ0CE tbs TV, 영상기록 서울, 시간을 품다 - 제2회 근대의 엘레지 명치좌(明治座)]《tbs》2013-3-25</ref><ref>[http://www.mediafine.co.kr/news/articleView.html?idxno=1590 백남우 칼럼, 근대의 엘레지 ‘명치좌’] 백남우《미디어파인》2015-01-19</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2532245 명동예술극장의 숨겨진 비밀]《연합뉴스》2009-03-03</ref>
 
==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