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헌명숙황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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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B Song Dynasty Empress of Zhenzong.JPG|섬네일|장헌명숙황후]]
'''장헌명숙황후 유씨'''(章獻明肅皇后 劉氏, [[968년]] ~ [[1033년]])는 [[북송 진종]]의 황후로 이름은 유아(劉娥)이다. 중국 역사상 최초로 [[수렴청정]]을 한 태후이며 [[고황후]], [[측천무후]]와 함께 중국의 3대 여주(女主)로 불린다.<ref name="지앙">지앙성난, 《중국을 뒤흔든 여인들》, 강성애 역, 시그마북스, 2009, p.189~p.190, {{ISBN |9788984453302}}</ref>
 
== 생애 ==
=== 젊은 시절 ===
황실 기록에는 유아가 [[오대 십국 시대]]에 우효위대장군(右驍衛大將軍)을 지낸 유연경의 손녀로, 호첩도지휘사(虎捷都指揮使)와 가주자사(嘉州刺史) 등을 지낸 유통(劉通)과 명문가 출신의 방씨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라고 적고 있다.<ref>장유유, 《황제 배후의 여인》, 허유영, 에버리치홀딩스, 2007, p.265, {{ISBN |9788995825198}}</ref> 그러나 이러한 기록들은 유아가 출신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후대에 만든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ref>지앙성난, p.191</ref> 유아는 전쟁중에 가족을 잃고 북을 치는 기예로 생계를 유지하며 떠돌이 생활을 하던 중 은을 단련하는 대장장이 공미를 만나 수도인 [[카이펑|개봉]]으로 갔다. 공미는 양왕 조항(훗날의 [[북송 진종|진종]])의 하인 장기(張耆)와 알고 지냈는데, 조항이 익주의 여인이 아름답고 재주가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익주 출신의 여인을 수소문하자 공미는 유아와 의논해 장기를 통해 유아를 조항에게 추천했다.<ref>장유유, p.266</ref> 조항은 유아를 마음에 들어했으나 유아에게 너무 빠진 나머지 건강이 나빠지자 조항의 유모인 진국부인이 이를 알고 [[북송 태종|태종 조광의]]에게 알렸고 조광의는 격노해 유아를 양왕부에서 내쫓게 했다.<ref name="z267">장유유, p.267</ref> 할 수 없이 조항은 유아를 장기의 집에 숨겨두었고 조광의는 아들에게 반미의 딸([[장회황후|장회황후 반씨]]), 곽수문의 딸([[장목황후|장목황후 곽씨]]) 등을 아내로 맞게 했지만 조항은 15년간 변함없이 유아를 총애했다.<ref name="z267"/>
 
=== 황후 시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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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태후 시절 ===
2년 뒤인 [[1022년]] 진종이 세상을 떠나자 조정이 인종으로 즉위했고 유아는 진종의 유언에 따라 황태후로서 섭정을 하게 되었다. 대신들은 유아에게 응원숭덕인수자성태후(應元崇德仁壽慈聖太后)라는 존호를 올렸고, 태후의 생일인 장녕절(長寧節)을 황제의 생일인 건원절(乾元節)에 필적하게 성대히 치렀다.<ref name="z275">장유유, p.275~p.276</ref> 권력을 손에 쥔 유아는 사사건건 자신과 대립했던 구준과 이적을 좌천시켰고<ref name="z275"/> 심복 정위가 뇌윤공과 결탁해 권세를 휘두르려 하자 뇌윤공을 처형시키고 정위를 유배시켰다.<ref>지앙성난, p.207</ref> 정위 외에도 [[왕흠약]], [[임특]], [[진팽년]], [[유승규]] 등 오귀(五鬼)로 불리며 진종의 총애를 받던 대신들을 숙청하고 [[왕증]], [[여이간]], [[노종도]], [[장지백]]과 같은 명신을 기용했다.<ref>지앙성난, p.208</ref> 진종 후기에는 도교 사원의 건축과 제사에 막대한 비용을 지출하여 재정난을 겪고 있었는데 출신이 비천했던 유아는 하층민들의 고충을 잘 이해하고 있었기에<ref>지앙성난, p.209</ref>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 도교 사원의 건축과 불필요한 노역을 금지시켰다.<ref name="지앙210">지앙성난, p.210</ref> 또한 도교 사원에 들어가는 비용을 줄이고 사원에 바치는 공물도 금지하였으며 세금을 감면시켜주는 등 선정을 펼쳤다.<ref name="지앙210"/> 그러나 유아의 권력이 워낙에 막강했기 때문에 대신들은 그녀가 [[측천무후]]의 전례를 밟아 황제로 즉위할 것을 두려워했다.<ref>장유유, p.281</ref> 유아에게서 무측천이 어떤 인물이냐는 질문을 들은 노종도는 일부러 당대의 죄인이라고 대답했고, 유아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포기했다.<ref>장유유, p.283</ref> 인종은 유아의 친아들이 아니었지만 유아는 생전 인종의 출생의 비밀이 새어나가지 않게 하려고 애썼으며, 인종의 교육과 식사에도 각별한 관심을 쏟았다. 특히 《[[효경]]》을 강조하는 등 자신과 인종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려고 노력했다.<ref name="z280">장유유, p.280</ref> [[1032년]] 인종의 생모인 이씨가 죽자 유아는 서둘러 그녀의 장례를 궁인의 예로 치르려 하였으나 재상 여이간의 반대에 부딪혀 이씨의 시신에 황후의 옷을 입히고 수은으로 봉해 주었다.<ref name="z280"/> 시신을 궁밖으로 내갈 때에도 여이간이 서화문으로 나가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유아는 황태후의 장례와 동격이니 안 된다고 거절하였지만 환관 나숭훈의 설득으로 결국 이씨의 장례를 성대히 치러 주었다.<ref>청휘, 장허성, 《중국을 말한다 11》, 이원길 역, 신원문화사, 2008, p.122, {{ISBN |9788935914500}}</ref> 이듬해인 [[1033년]] [[3월 29일]] 유아는 65세로 세상을 떠났고 인종은 측천무후가 네 자의 시호를 가졌던 것에 따라 장헌명숙(章獻明肅)의 시호를 바쳤다.<ref name="지앙220">지앙성난, p.220</ref> 이로써 유아는 이전의 태후들의 시호가 두 글자였던 데에 반해 처음으로 네 글자의 시호를 쓴 태후가 되었고,<ref name="z285">장유유, p.285</ref> 이후로도 수렴청정을 한 태후는 네 자의 시호를 가지게 되었다.<ref name="지앙220"/>
 
=== 사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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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문헌 ==
* 샹관핑, 《중국사 열전, 후비 - 황제를 지배한 여인들》, 달과소, 2008, {{ISBN |9788991223226}}
 
{{송나라의 황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