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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王에게 가다|날짜=2010
|출판사=지오마케팅/문화재청
|id={{ISBN |978-89-92158-08-4}}|쪽=21}}</ref>
 
==== 제향 공간 ====
 
===== 정자각 =====
정자각(丁字閣)은 정(丁)자 모양의 건물로 제례 시 [[정자각]] 내부에 있는 [[제구]]에 제물을 진설하고 제사를 지낸다. 조선왕릉에서는 필수적인 건축물이다. 조선왕릉의 정자각은 대개 맞배지붕으로 되어있지만, [[동구릉]] 내에 있는 [[숭릉 (조선)|숭릉]]은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이는 당시 [[병자호란]]과 [[명나라]]의 멸망 직후인 17세기 말에 불던 [[소중화사상|중국화의 유행]]에 따른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또한, 숭릉의 정자각에는 좌우에 익랑(翼廊)이 붙어 있는데, 이는 후대의 정자각으로 계승되어 [[휘릉]]과 [[의릉 (조선)|의릉]] 등의 정자각에도 익랑이 추가되었다.<ref>{{서적 인용 |저자=이호일 |기타= |제목=조선의 왕릉 |날짜=2003 |출판사=도서출판 가람기획 |id={{ISBN |978-89-8435-158-5}} |쪽=298}}</ref> 2011년 12월에는 [[문화재청]]은 동구릉에 위치한 [[건원릉]]과 [[숭릉 (조선)|숭릉]], [[목릉 (조선)|목릉]]의 정자각을 역사적·예술적·학술적 가치가 큰 곳으로 밝혀 국가지정문화재인 [[대한민국의 보물|보물]]로 지정했다.
 
정자각 내부에는 제사를 지내는데 쓰이는 제구(祭具)가 있다. 제후국이었던 [[조선]]에서는 제구들을 붉은색으로 칠해놓았으며, [[대한제국]] 때는 황릉과 황제로 추숭된 능의 제구들에 황제를 상징하는 노란색으로 칠했다. 황릉인 [[홍유릉]]과 황제로 추숭된 [[조선 태조|태조]]의 능인 [[건원릉]]의 제구가 대표적인 예이다.
풍수지리가 모두 정확한 것은 아니었지만, 풍수지리를 중요시 했던 조선시대에는 풍수지리상의 문제로 왕릉을 천장하기도 하였다.
 
풍수지리상의 문제가 처음으로 제기되었던 것은 세종의 [[영녕릉|영릉]]이었다. 세종이 처음으로 묻혔던 곳은 [[헌인릉|헌릉]] 서쪽에 위치하였다. 문제는 당시에 풍수가 최양선이 ‘이곳은 절사손장자(絶嗣損長子:후손이 끊기고 장자를 잃는다.)할 땅이다.’라고 하여 많은 논란을 일으켰었다. [[의정부]]와 [[예조]]에서 최양선을 벌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세종은 벌을 주지 않는 대신, 나라의 대사에는 쓰지 않도록 하였다.<ref>[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clsName=&searchType=a&query_ime=%EC%A0%88%EC%82%AC%EC%86%90%EC%9E%A5%EC%9E%90&keyword=%EC%A0%88%EC%82%AC%EC%86%90%EC%9E%A5%EC%9E%90 세종 99권 25년 2월 2일 (무자) 1번째기사 / 의정부와 예조에서 최양선을 벌할 것을 청하였으나 거절하다.]</ref> 하지만, [[조선 문종|문종]]이 일찍 죽고 [[조선 단종|단종]]을 마지막으로 후손이 끊겼으며, [[조선 세조|세조]]의 장자인 [[조선 덕종|의경세자]]와 [[조선 예종|예종]]의 장자인 [[인성대군]]이 일찍 죽는 등 여러 불행들이 닥쳐 왔기에 예종 때 세종의 왕릉을 오늘날의 자리인 여주로 이장하였다.<ref>{{서적 인용 |저자=박시백 |기타= |제목=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세종실록|날짜=2005 |출판사=휴머니스트 |id={{ISBN |978-89-5862-038-9}}|쪽=189 ~ 190}}</ref>
 
이 외에 [[조선 철종|철종]] 때 [[조선 문조|익종]]의 [[수릉 (조선)|수릉]]도 풍수지리 상 불길하다는 의논으로 양주 용마산의 길지로 천장했다가, 1855년 8월 26일에 현재 위치인 [[건원릉]] 왼쪽의 언덕으로 천장되었다.<ref name="이호일삼팔삼">이호일, 위의 책, 383 ~ 384쪽.</ref> 같은 시기에 [[조선 순조|순조]]의 [[인릉 (조선)|인릉]]은 파주의 [[장릉 (조선 인조)|장릉]]의 왼쪽 산줄기에 초장되었으나 그 곳 역시 풍수지리상 불길하다는 논의가 있어 1856년 10월 11일에 [[헌인릉|헌릉]] 옆의 언덕으로 천장되었다.<ref name="이호일삼팔삼"/><ref>[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clsName=&searchType=a&query_ime=%EC%9D%B5%EC%A2%85+%EC%88%98%EB%A6%89+%EC%B2%9C%EB%B4%89&keyword=%EC%9D%B5%EC%A2%85+%EC%88%98%EB%A6%89+%EC%B2%9C%EB%B4%89 철종 7권 6년 1월 18일 (임오) 1번째기사 / 인릉·수릉 등의 천봉을 의논하여 결정하다.]</ref>
 
=== 정치적·개인적인 문제 ===
풍수적인 문제 이외에 간혹 한 사람의 뜻으로 인해 천장된 사례도 있었는데, [[조선 중종|중종]] 때 [[김안로]]가 자신의 정적이었던 [[정광필]]을 제거하기 위하여 [[장경왕후 (조선)|장경왕후]]의 [[희릉 (조선)|희릉]]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다. 내용인 즉슨, ‘산릉 조성 작업 도중에 암반이 나왔는데, 암반을 파낸 자리에 국모를 안장한 것은 지기가 끊어진다.’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암반이 나왔으나, 중종은 당시 길흉을 점쳐서 괜찮다 하였기에 암반이 나온 자리에서 몇 자 아래로 옮겨 썼던 것이다. [[김안로]]는 천장을 강력히 요구하였고, 그의 뜻대로 천장을 하게 되었다. 그 뒤 김안로 측에서는 관련자였던 [[정광필]]에 대한 처벌을 상소하였고, 결국 정광필은 [[유배]]형에 처해졌다.<ref>{{서적 인용 |저자=박시백 |기타= |제목=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중종실록|날짜=2006 |출판사=휴머니스트 |id={{ISBN |978-89-5862-105-8}}|쪽=163 ~ 166}}</ref>
 
그 뒤 중종의 두 번째 계비였던 [[문정왕후 (조선)|문정왕후]]는 [[장경왕후 (조선)|장경왕후]]와 나란히 묻혀 있는 중종을 [[조선 성종|성종]]의 [[선정릉|선릉]] 옆으로 천장하였는데, 이는 자신이 그 옆에 묻히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새로 천장된 [[선정릉|정릉]]에서는 장마 때면 물에 잠기곤 해서 문정왕후는 자신의 바람과는 다르게 정릉과 멀리 떨어진 [[태강릉|태릉]]에 묻히게 되었다.<ref>{{서적 인용 |저자=박시백 |기타= |제목=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인종·명종실록|날짜=2006 |출판사=휴머니스트 |id={{ISBN |978-89-5862-143-0}}|쪽=118}}</ref>
 
== 제례 의식 ==
|제목=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세종실록|날짜=2005
|출판사=휴머니스트
|id={{ISBN |978-89-5862-038-9}}|쪽=25 ~ 26}}</ref> 그 뒤 [[조선 현종|현종]] 때 송시열의 청으로 신덕왕후는 다시 왕후로 추숭하였고, 이에 따라 정릉도 다시 추봉되어 석물들이 설치되었는데, 이러한 까닭에 [[정릉 (신덕왕후)|정릉]]에는 조선 초기의 사각장명등과 조선 후기의 석물들이 공존하게 되었다.<ref>[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ra_200001&tabid=k 현종대왕행장]</ref>
 
====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 의한 훼손 사례 ====
|기타=
|제목=신들의 정원 조선왕릉|날짜=2010
|출판사=책보세|id={{ISBN |978-89-369-0965-9}}|쪽=46 ~ 48}}</ref>
 
그리고 [[대한민국 중앙정보부|중앙정보부]](현 [[대한민국 국가정보원|국가정보원]])가 [[의릉 (조선 경종)|의릉]] 내에 자리잡았는데 불교를 배척했던 조선의 왕릉인 의릉 내에 [[석탑]] 한 쌍이 세워져 있고, 그 사이에는 큰 연못이 있으며, 경내에는 외래종의 식물들이 있어 의릉이 가지고 있었던 조선왕릉의 기본 능제를 훼손하고 중앙정보부의 휴식 공간으로 바꾼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있었다. 중앙정보부가 들어선 뒤에는 중앙정보부가 의릉을 관리해왔기 때문이다. 중앙정보부와 그 후신이었던 안기부([[국가안전기획부]])가 있는 동안에는 일반인의 출입은 통제되었고, 이후 안기부가 [[서초구]]로 이전한 1995년 9월 이후에 시민들에게 개방되었다.<ref>이호일, 위의 책, 314 ~ 315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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