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소 (후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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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벌로서의 활약===
초평 2년([[191년|191]]), [[공손찬]]이 [[동탁]] 토벌을 명분으로 [[한복 (후한)|한복]]이 지배하는 기주를 침공해 [[한복 (후한)|한복]]을 격파했다. 이때 원소는 기주목이었던 [[한복 (후한)|한복]]에게 부득이하게 종속되어 견제, 감시를 받는 입장에 있었으나 배후에서 [[공손찬]]의 기주 공격을 조장한 흑막의 장본인이기도 했다. [[한복 (후한)|한복]]이 패배하여 지배력이 약해진 틈을 타 영내에선 반란이 일어났고, 흑산적(黑山賊) [[장연 (
원소가 [[한복 (후한)|한복]]을 협박하여 기주를 빼앗는 데 이용당한 셈이 된 [[공손찬]]은 원소와 대립하고 있던 사촌동생 [[공손월]](公孫越)을 파견하여 [[원술]]과 우호관계를 맺었다. [[원술]]은 [[손견]](孫堅)과 [[공손월]]을 파견해 원소의 간접적인 세력권 내에 있던 양성을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패배했을 뿐만 아니라 [[공손월]]은 날아온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이에 [[공손찬]]은 더욱 대노하여 원소를 칠 것을 다짐하고 반하(磐河)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당시 [[공손찬]]은 하북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형성한 군벌이었으므로 원소는 직접 대결을 피하고 발해태수의 직위를 [[공손찬]]의 종제 [[공손범]](公孫範)에게 양도하면서 [[공손찬]]을 회유하려 하였으나, [[공손찬]]은 청주(靑州)·서주(徐州) 일대까지 세력을 확대하여 더욱 강성해졌고, 마침내 기주를 공격했다(192년 1월). 이때 [[공손찬]]의 무시무시한 위세에 하북 전체가 흔들렸으며 기주의 수많은 성읍들이 [[공손찬]]에게 투항하였다고 한다. 이를 좌시할 수 없었던 원소는 마침내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나와 [[공손찬]]과 일전을 벌인다. 당시 막 출범한 신생세력에 지나지 않았던 원소는 [[공손찬]]에 비해 군대의 수와 장비, 훈련도 등 여러 면에서 압도적으로 불리하였으나 반하, 계교에서 거듭 벌어진 회전에서 [[공손찬]]을 크게 격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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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손찬]]은 비록 계교 전투에서 대패하였으나 이후에도 거듭 군사를 일으켜 원소를 공격하였다. 전투는 여러 곳에서 한동안 계속되었는데, 마침내 원소와 [[공손찬]]은 평원군 일대에서 다시 만나 회전을 벌였고, 여기서 [[공손찬]]은 또다시 원소에게 대패하였다. 다급해진 [[공손찬]]은 초평 4년([[193년]]) 초에 원소와 화친을 맺었다.
초평 4년([[193년|193]]), 흑산적의 총수 [[장연 (
[[공손찬]]은 화친을 맺고 후퇴하였으나 장연의 공격으로 원소가 위기에 몰리자 곧 이를 파기하고 다시 원소를 공격하였다. 하지만 [[공손찬]]은 이 무렵부터 평소의 과격하고 잔인한 성품이 더욱 두드러지고 명망 높은 황족 [[유우 (후한)|유우]]를 죽인 일로 인해 신망을 완전히 잃었으며 내부 문제에 시달렸으므로 더이상 대대적인 공세를 취하지 못하였다. [[장연 (
[[흥평]](興平) 2년([[195년|195]]), 포구에서 원소군과 전투를 벌인 [[공손찬]]은 참패하여 수만 명의 군사를 잃었고, 각지의 반란으로 인해 그 위세가 극도로 약해져 몰락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공손찬]]은 역경(易京)에 요새를 짓고 수비에 전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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