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강화 회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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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뜻|파리 회의 (1856년)조약||1856년의다른 년도의 파리 회의}}
'''파리 강화 회의'''({{lang|en|Paris Peace Conference}})는 [[1919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들이 연합국과 [[동맹국]] 간의 평화 조약을 협의하기 위해 개최한 국제 회의이다. 회의는 [[1919년]] [[1월 18일]] 개최되어 [[1920년]] [[1월 21일]]까지 간격을 두고 지속되었다.  이 파리 강화 회의는 1920년 1월 21일에 열린 국제 연맹의 첫 의회 취임식과 함께 끝이 났다. 
 
== 독일의 식민지 문제 ==
[[파일:WWI-re.png|섬네일|300px|이 지도는 세계 제1차 대전 참가자들을 그린 세계 지도이다. 협상국들 (승전 연합군 )과 그들의 식민지 소유물들은 녹색, 패전한 동맹국과 그들의 식민지 소유물들은 주황색, 중립국들은 회색으로 표현하였다. 이 지도를 보면 승전국들이 엄청난 식민지들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파리 강화 회의에서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었기 때문에 베르사유 평화 회의라고도 알려진 파리 평화 회의는 연합 승리군들의 만남이었고,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패전 동맹국가들을 위한 평화 협정을 수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파리 강화 회의의 중심 이슈는 독일의 해외 식민지들의 배치였다. (오스트리아는 식민지가 없었고, 오스만 제국은 별개의 문제를 제시했다.) 영국의 지배자들은 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한 그들의 희생에 대한 보상을 원했다. 호주는 뉴기니를 원했고 뉴질랜드는 사모아를 원했다. 그리고 윌슨은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져 있는, 패전국에 적용되는 민족 자결주의를 원했다. 독립을 위한 준비가 되어 있을 때까지 모든 독일 식민지들이 그들의 나라를 스스로 통치하길 원했다. 결국에는, 승전국들이 독일의 식민지를 비롯해 엄청난 영토를 가져가게 되었다.
 
[[파일:WWI-re.png|섬네일]]
By Thomashwang at the English language Wikipedia, CC BY-SA 3.0, <nowiki>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2389813</nowiki>
 
이 지도는 세계 제1차 대전 참가자들을 그린 세계 지도이다. 협상국들 (승전 연합군 )과 그들의 식민지 소유물들은 녹색, 패전한 동맹국과 그들의 식민지 소유물들은 주황색, 중립국들은 회색으로 표현하였다. 이 지도를 보면 승전국들이 엄청난 식민지들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다섯 개의 평화 조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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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의 산둥 문제 ==
파리 평화 회의에서 중화민국 대표는 서방 열강과 일본이 중국에서 강탈한 제권익의 반환을 요구하는 다음과 같은 7개 조항의 요구조건을 제시했다.<ref name="김하룡"/>
파리 평화 회의에서 중화민국 대표는 서방 열강과 일본이 중국에서 강탈한 제권익의 반환을 요구하는 다음과 같은 7개 조항의 요구조건을 제시했다.<ref name="김하룡"/>: (1) 중국에 설치된 세력범위의 포기, (2) 중국에 주둔하는 각국 군대의 철수, (3) 각국이 중국에서 경영하는 우편전보사업의 폐지, (4) 영사재판권의 철회, (5) 조차지의 반환, (6) 조세의 반환, (7) 관세 자주권의 승인.<ref name="김하룡"/> 그리고 여기에 일본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탈취한 각종 권익의 반환을 요구하는 조목이 부가되어 있었다.<ref name="김하룡"/> 이 요구 조건 속에는 패전국인 독일이 [[산둥 성|산둥]] 내에서 차지하고 있던 식민지적 권익을 중국이 돌려받아야 한다는 점도 포함되어 있었다. 파리 강화 회의에 앞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강조하여 중화민국의 요구를 찬성, 지지함으로써 중국 국민에게 큰 기대를 주었다.<ref name="학문사"/> 그런데, 일본은 21개조 요구 가운데 산둥 문제에 관한 것과 [[돤치루이]] 정권이 [[1918년]]에 일본과 교환한 산둥 문제에 관한 공문을 근거로 산둥 문제는 중·일 간의 문제라고 주장했다. 문서상의 증거가 있었던데다가 영국·프랑스 등의 연합국이 1918년의 중일협약을 지지해주기로 일본과 약속했었으므로, 4월 21일의 회의에서 결국 일본 측의 주장이 승인되었다. 일본은 영국, 프랑스와의 비밀협정을 통하여 이에 구 독일 권익은 완전히 일본에 양도하기로 되어 있었다.<ref name="학문사"/> 물론 우드로 윌슨은 이에 반대하였으나 영국, 프랑스의 강력한 주장에 굴복하게 되었고 중국에 대한 약속을 저버린 것이었다.<ref name="학문사"/> 산둥 반도 문제에 관한 파리강화회의의 결정을 알리는 전보가 [[1919년]] [[4월 30일]] 베이징(北京)에 퍼졌고, 이어 5월 1~3일 베이징의 신문에 산둥의 권익을 일본에게 빼앗긴 소식과 그 이유가 보도되었고, 이는 [[5·4 운동]]의 시발점이 된다. (→[[5·4 운동]])
#중국에 설치된 세력범위의 포기
#중국에 주둔하는 각국 군대의 철수
#각국이 중국에서 경영하는 우편전보사업의 폐지
#영사재판권의 철회
#조차지의 반환
#조세의 반환
#관세 자주권의 승인.<ref name="김하룡"/>
 
파리 평화 회의에서 중화민국 대표는 서방 열강과 일본이 중국에서 강탈한 제권익의 반환을 요구하는 다음과 같은 7개 조항의 요구조건을 제시했다.<ref name="김하룡"/>: (1) 중국에 설치된 세력범위의 포기, (2) 중국에 주둔하는 각국 군대의 철수, (3) 각국이 중국에서 경영하는 우편전보사업의 폐지, (4) 영사재판권의 철회, (5) 조차지의 반환, (6) 조세의 반환, (7) 관세 자주권의 승인.<ref name="김하룡"/> 그리고 여기에 일본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탈취한 각종 권익의 반환을 요구하는 조목이 부가되어 있었다.<ref name="김하룡"/> 이 요구 조건 속에는 패전국인 독일이 [[산둥 성|산둥]] 내에서 차지하고 있던 식민지적 권익을 중국이 돌려받아야 한다는 점도 포함되어 있었다. 파리 강화 회의에 앞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강조하여 중화민국의 요구를 찬성, 지지함으로써 중국 국민에게 큰 기대를 주었다.<ref name="학문사"/> 그런데, 일본은 21개조 요구 가운데 산둥 문제에 관한 것과 [[돤치루이]] 정권이 [[1918년]]에 일본과 교환한 산둥 문제에 관한 공문을 근거로 산둥 문제는 중·일 간의 문제라고 주장했다. 문서상의 증거가 있었던데다가 영국·프랑스 등의 연합국이 1918년의 중일협약을 지지해주기로 일본과 약속했었으므로, 4월 21일의 회의에서 결국 일본 측의 주장이 승인되었다. 일본은 영국, 프랑스와의 비밀협정을 통하여 이에 구 독일 권익은 완전히 일본에 양도하기로 되어 있었다.<ref name="학문사"/> 물론 우드로 윌슨은 이에 반대하였으나 영국, 프랑스의 강력한 주장에 굴복하게 되었고 중국에 대한 약속을 저버린 것이었다.<ref name="학문사"/> 산둥 반도 문제에 관한 파리강화회의의 결정을 알리는 전보가 [[1919년]] [[4월 30일]] 베이징(北京)에 퍼졌고, 이어 5월 1~3일 베이징의 신문에 산둥의 권익을 일본에게 빼앗긴 소식과 그 이유가 보도되었고, 이는 [[5·4 운동]]의 시발점이 된다. (→[[5·4 운동]])
 
== 베트남의 청원 ==
1919년 파리 강화 회의가 열리고 있는 베르사유 사무국에 베트남의 청년 [[호찌민]]이 찾아왔다.<ref name="전국"/> 그는 "베트남인과 프랑스인을 법적으로 동등하게 대우할 것, 프랑스 의회에 베트남 대표가 참석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할 것" 등 8개 항으로 이루어진 《베트남 인민의 요구서》라는 청원서를 제출하였다.<ref name="전국"/> 그러나 조선의 대표단이 그랬던 것처럼 이 요구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호찌민은 회담장 복도에서 쫓겨났다.<ref name="전국"/> `
 
== 각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