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득: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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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득'''(李鐵得, [[1780년]] ~ ?)은 [[조선]] 후기의 왕족이자 국사범으로 [[조선 장조]]의 서자인 [[은언군]] 이인의 서자였다. [[상계군]] 이담의 이복 동생이고 ,[[풍계군]] 이당의 이복 형이고, 초명이 이쾌득이었던 [[전계대원군]] 이광의 친형 또는 이복 형이다. [[조선 순조|순조]]의 서 사촌형이다. 생전 그는 왕족이 아닌 평민 신분이었다.
 
[[상계군]] 담이 [[홍국영]]에 의해 [[원빈 홍씨]]의 양자가 된 일로 역적으로 몰려 가족과 함께 [[강화도]]로 유배되고, [[1801년]] [[상산군부인 송씨|상산군부인 송마리아]]와 [[평산군부인 신씨 (상계군)|평산군부인 신마리아]]가 [[천주교]]에 귀의한 일로 사형당하자 아버지 [[은언군]] 이인과 함께 새벽에 도주하려다가 체포되었다. [[1812년]](순조 12) 당시 나이 30대였으나 미혼이었으며, [[1813년]] 이후의 행적은 미상이다.

1817년 채수영 등이 그를 추대하려다가 적발되었다. 자녀가 없었고 [[조선 철종|철종]] 즉위 후에도 조명받지 못하고 증직과 증작도 내려지지 않았다. [[시호]]에 대한 기록은 없다.
 
한때 [[상계군]] 또는 [[풍계군]]의 어릴 적 이름으로 추정되었으나 출생년대가 다르다. [[전산군부인 이씨]]의 일찍 죽은 첫 아들이며 첫 이름이 쾌득이었던 전계대원군의 친형과 동일인물인지, 혹은 [[은언군]] 이인의 또다른 첩이 낳은 자녀로 [[이성득 (조선 왕족)|이성득]]의 동복 동생인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이고, 자와 호는 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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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5년]] [[8월 27일]] [[강화도]]에 이철득, [[이성득]], 이쾌득이 감금당한 집에 불이 나 [[강화부]]유수 오재소(吳載紹)가 조정에 장계를 올려 보고하였다.<ref>승정원일기 1898권 1805년(순조 5년, 청 가경 10년) 8월 29일 기유 19번째 기사</ref> [[1812년]](순조 12) [[2월 24일]] [[강원도]][[관찰사]] 이호민(李好敏)의 비밀 계획에 의해 [[강화도]]로 파견된 [[의금부|금부]][[도사]]의 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그는 얼굴이 철색이고 구레나룻이 짧고 다소 비대하였다 한다.
 
[[1817년]] [[홍경래의 난]]에 가담했다가 살아남은 채수영 등이 김조순 등 세도가를 비난하고 무사를 모아 거병하려다가 체포되고 사형당했다. 이때 그는 추대대상이었으나 죽음을 모면하였다.
 
[[1817년]](순조 17) [[11월 30일]] 형 [[이성득]]이 형문을 받다가 고문치사하면서 [[조선 순조|순조]]는 은언군의 자녀들을 석방하려했다. [[조선 순조|순조]]는 특별 명령을 내려 이철득과 이쾌득을 임시로 풀어주었다.<ref>"승정원에서 의계하여 죄인을 옮기면 안된다고 하였으나, 듣지 않다", 순조실록 20권, 1817년(순조 17년, 청 가경 22년) 11월 30일 기사 2번째기사</ref> 이후의 행적은 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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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순조]]
{{Col-2}}
* [[채수영의 난]]
* [[사도세자]]
* [[평산군부인 신씨 (상계군)|평산군부인 신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