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청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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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지청천은 상하이 임시정부에 있었고 곧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만주군정부로 건너갔다가 초빙을 받고 '''[[서로군정서]]'''로 건너가 서로군정서 간부에 취임, 활동하였다. 그러나 [[청산리 대첩]] 이후 일본군의 한국인에 대한 대대적인 보복을 피하여 신흥무관학교를 폐교하고 병력을 간도로 이끌고 건너가, [[서일]], [[홍범도]], [[김규식 (1881년)|김규식]], [[김좌진]] 등과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다.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 이후 이르쿠츠크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오하묵]] 등과 [[고려혁명군]](1921.8)을 결성했다. → [[ 김규식]], [[이범석 (1900년)|이범석]]이 만든 길림성 소재의 고려혁명군(1923.5)과는 별개의 단체이다. 같은 해 10월 고려혁명군관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1922년 4월경 군관학교 교육방침과 소련 당국의 규정이 대립되어 체포되었으나 7월 임시정부의 노력으로 석방되었다.
 
[[양기탁]], [[오동진 (1889년)|오동진]] 등과 '''[[정의부]]''', 후에 [[참의부]]와 통합된 [[국민부|혁신의회]]를 조직했으며, 김좌진이 저격당한 후인 [[1930년]] 7월에는 [[한국독립당 (북만주)|한국독립당]] 창당에 참여하고, 별도로 한국독립군을 만들어 독립군의 총사령관에 취임하였다.<ref name="다음1">[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20j0820a 지청천 - Daum 백과사전<!-- 봇이 붙인 제목 -->]</ref>
 
만주에서 중국 호로군과 연합해 한중연합작전을 벌였으나(대전자령, 쌍성보전투), [[1933년]] 5~6월경 중 지청천과 이범석은 100여 명의 장정들을 이끌고 중국 본토로 건너왔다.<ref name="lee64">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64페이지</ref> [[1933년]] 후반 김구 세력과 합류하였으나 [[1934년]] 지청천은 탈당, '''신한독립당'''을 창설하여 따로 나갔다.<ref name="lee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