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 해릉양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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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1년]]) 거란족이 북서쪽 지방에서 난을 일으켰으며 게다가 동경 요양부에서 종제인 오록(烏祿)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런데 해릉양왕은 난을 진압하기는커녕 남송 침공에만 더욱 골몰하였다. 그러나 결국 패배하였고 양주(揚州)에서 반란에 호응한 자신의 부장이 일으킨 병변(兵變)으로 막사에서 살해당하고 오록, 즉 완안옹(完顔雍)은 [[금 세종]](世宗)이 되어 [[송나라]]의 [[남송 효종]]과 화평을 맺었다. 금 세종은 해릉왕의 사후 제위를 박탈했으며 다시 해릉서인(海陵庶人)으로 강등시켰다.
 
==사후==
그는 죽은 뒤에 진정한 굴욕을 맛봤는데, 금세종은 해릉왕의 태자 완안광영을 포함하여 그의 자손들을 모두 죽이고 해릉왕을 서인으로 격하시켰다. 무엇보다 해릉왕의 시체를 중도대흥부에 성대히 세운 황제 묘역에 안 묻었는데, 황제 자격이 없는 짓을 했고 서인으로 떨어졌으니 예를 갖추지 않았다. 금세종은 해릉왕의 시체를 중도대흥부에서 멀리 떨어진 모래밭에 그냥 파묻어 버렸다. 인과응보의 대가를 제대로 받은 셈이다.
 
== 존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