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Metrobot (토론 | 기여)
잔글 위키데이터와 로컬이 같은 위키공용분류 링크 조정
341번째 줄:
[[1894년]] 3월 중순 경 상하이에 도착한 김옥균 일행은 외국인 거주지 안에 있는 한 여관에 투숙하였다. 투숙한 다음 날 오후, 김옥균 일행은 거리를 구경하기로 하고 오전에는 각자 용무를 보았다.
 
[[1894년]] 3월 27일 오후, [[윤치호]]가 [[청나라]] [[상하이]]에 체류하면서 지냈을 때 [[윤치호]]는 김옥균과 [[홍종우]] 등 일행을 받아들였다. 김옥균은 [[윤치호]]에게 "리훙장의 양아들 리징방의 초청으로 오게되었다.<ref name="김옥균 생애">《인물로 보는 조선사》,p 437~p464</ref><ref name="김삼웅95">김삼웅, 《친일정치100년사》(동풍, 1995년) 43쪽.</ref> 경비는 [[홍종우]]라는 자가 대고 있다."고 말하자, [[윤치호]]는 의아스러운 눈빛으로 "[[홍종우]]는 (조선에서 보낸) [[스파이]] 같으니 조심하라"고 경고했다고 한다. 그러자, 김옥균은 "그가 스파이일 리가 없다."고 답했다 한다.<ref name="김옥균 생애"/><ref name="김삼웅95"/> 김옥균이 일본 망명 시절, 단발을 하고 이와타 슈사쿠로 개명한 데 반해 홍종우는 파리 체류 시절 늘 한복을 입고 다녔다. 김옥균은 일본을 조선의 나아갈 모델로 보고 일본의 도움을 받아서 근대화를 추진하려고 했었으나, 홍종우는 서구 문명을 익히면서도 그 속에 숨겨진 제국주의의 야심을 경계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143&aid=0000004158 ‘그래서 나는 김옥균을 쏘았다’…암살자 홍종우와 김옥균, 과연 누가 옳았는가] 쿠키뉴스 2005년 11월 25일자</ref>
 
[[3월 27일]] 김옥균은 인편으로 [[윤치호]]에게 오후 1시 반에 자신이 숙박하고 있는 동화양행(청국 상하이 호텔)으로 와서 함께 갈 곳이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급히 보낸다. 그러나 [[윤치호]]는 학교 일이 바쁘다는 이유로 김옥균의 제안을 사양한다. 3월 28일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온 김옥균은 피곤하다고 침대에 누우면서, 와다에게 일본에서 타고 온 배의 사무장인 마쓰모토에게 전할 말이 있으니 그를 불러달라고 했다. 와다가 나가자 김옥균의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눈치챈 자객 홍종우가 때를 놓치지 않고 김옥균을 향해 리볼버 권총을 발사하였다.<ref name="김옥균 생애"/><ref name="김삼웅95"/>그는 곧 일본인 수행원들에 의해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오후 4시 경 사망한다(홍종우를 보낸 곳은 [[수구당]] 또는 민씨파라는 의견도 있다). 미행의 그림자를 예상한 [[윤치호]]는 김옥균의 암살 소식을 접하고 수시로 거처를 이동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44세였다. 9촌 [[김좌진]]은 1920년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에 승리를 거둔 이후 1월 24일 [[1930년]]에 중국에서 공산당원에게 피살당했다.김옥균의 손자([[김두한]])이며 1명을 보였으나, 1924년 그의 손자([[김두한]])가 9촌 아들([[김좌진]])을 상종하였으나, 1930년 [[김좌진]]이 사망하기 직전에 헤어졌다. 1966년 [[국회오물투척사건]]이 일어나자 국회발언방해협의로 [[경찰]]에 체포되어 [[서울구치소]]으로 구속되었고, 1972년 9월 김두한이 석방했다. 그의 손자 [[김두한]]는 [[1972년]] 고혈압,뇌출혈상태불명으로 사망하였으나, 생을 마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