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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본관의 정착 시기가 주로 신라 말 고려 초이다보니, 대부분의 본관이 신라와 고려의 국경(평양과 원산만) 이남에 존재하게 되었으며,<ref name='ksh' /> 평양과 원산(영흥) 이북에 발상지를 둔 본관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고려 태조가 940년 군현을 개편하면서 토성분정(土姓分定) 정책을 시행했다는 것은 어느 역사서에도 나오지 않는 개인 학설에 불과하다. 이 설은 전 영남대 교수 이수건(李樹健, 1935 ~ 2006)이 1984년에 펴낸 저서 "한국중세사회사연구(韓國中世社會史硏究)"에서 처음 제기한 것이다.<ref>이수건(李樹健, 1935 ~ 2006), 한국중세사회사연구(韓國中世社會史硏究), 일조각(一潮閣), 1984년<br>이수건, 한국의 성씨와 족보, (서울대학교출판부, 2003)</ref> 세종실록 지리지에 나오는 각 지방의 토성이 "옛 문적과 지금의 본도(本道) 관록(關錄)에 의거한 것"이라 한 말을 빌미로 옛 문적이 고려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단정하고 이런 주장을 한 것이지만, 실제로 그렇다는 증거는 없다. 토성분정이 실제로 있었다면 대다수 성본이 940년에 일시에 생겨난 것으로 보아야 하지만, 세종실록 지리지에 나오는 다수 토성의 시조의 시대는 실제로는 고려초부터 고려말까지 긴 기간에 걸쳐있으므로, 토성분정이란 정책이 실제로 시행되어에 대다수 성본이 고려 태조 때 생겨났다는 주장은 아무 설득력이 없다. 토성분정이 정말로 있었던 정책이라면 이런 중요한 정책이 고려사에 한 귀절도 나오지 않을 리가 없고, 실제 성씨의 역사적 사례들과 맞지도 않으므로, 이런 정책은 없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ref>김수태(金壽泰), 高麗初期의 本貫制度 - 本貫과 姓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국중세사연구 제8호 43~70쪽, 2000) : 김수태는 토성분정설을 부인한다. 토성(土姓)이라는 말 자체도 고려사(高麗史) 등 고려시대 문헌에는 어디에도 나오지 않으며, 경상도지리지 (慶尙道地理誌, 1425년, 세종 7)와 세종실록지리지 (世宗實錄地理志, 1454 단종 2년)에서만 일시적으로 쓰이다 그 후에 간행된 지리지들에서는 사라졌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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