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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보어인들의 조상은 [[종교]]적으로는 [[네덜란드]]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종교]]적 박해를 피해 이주한 [[장로교]] 신도들이며, 《교과서밖의 세계사 여행》(김성환 지음, [[사계절출판사|사계절]])에 따르면, 자신들에게 저항하는 [[줄루족]] 등의 [[원주민]]들을 [[소총]] 등의 우세한 화기로 [[학살]]하고(포장[[마차]]를 방탄벽으로 만들고, 총을 난사하여 줄루족 300명이상을 학살함), 북쪽으로 확장하였다. 19세기에 그들은 [[대영 제국]]에 맞서 [[오렌지 자유국]]와 [[트랜스발 공화국]]이란 작은 두개의 나라를 세워 독립을 쟁취하려 하였다. 이러한 작은 국가는 거의 반세기 동안 존재하였으나 [[2차 보어 전쟁|제2차 보어전쟁]]([[1899년]]~[[1902년]])에서 패하여 [[영국]]에 항복하고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1902년) 원래는 케이프 아프리카너와 보어는 구별되었으나 현재는 동의어처럼 쓰이고쓰고 있다. 보통 보어인은 [[국수주의]]적인 경향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현대의 일부 보어인들은 인종차별정책([[아파르트헤이트]], Apartheid)의 성립이 억지로 강요된 것이었으며 보어전쟁 혹은 [[마리츠 반란]]([[1914년]]) 과정에서 빚어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 보어전쟁 ==
 
=== 자원발견 ===
트렌스발 공화국(현재의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전략적 요충지일 뿐 아니라 풍부한 [[금]]과 [[다이아몬드]] 광산이 위치하고 있다. 1900년에는 트란스발의 금 매장지대인 랜드는 세계 금 공급의 25%를 생산하고 있었다. 이러한 금광붐에 따라 새로운 영국 이주민이 몰려들었고 이들은 '[[오이틀란데르]]'라고 불렸다. 이들이 점점 늘어 남에 따라 보어인들과 갈등을 일으켰다.
 
=== 보어전쟁 ===
결국 [[아프리카]]에서 세력을 넓히던 [[영국]]과 전쟁을 일으키게 되었는데 이것이 [[1차 보어 전쟁]]과 [[2차 보어 전쟁]]이다. 전쟁의 발달은 5년 이상 거주한 영국 이주민에게도 투표권을 달라는 요구를 구실로 한 것이었다. 보어 전쟁 당시 보어인들은 사실상 [[농부]]들에 불과했지만 [[민병대]]를 구성하여 [[영국군]]에 대항했다. 5만4천여 명밖에 안되는 소수였지만 맥심 [[기관총]], [[대포]], 최신 [[마우저|마우저총]] 등으로 무장했으며, 전쟁사학자 정토웅 육군사관학교 교수가 쓴 《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가람기획)에 따르면 적의 손이나 발을 맞출 정도로 뛰어난 [[사격]] 솜씨를 갖추었다고 한다.<ref>{{서적 인용|url=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88984353008|제목=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언어=ko}}</ref> [[1900년]] 스피온 콥에서의 전투는 보어인이 승리를 얻을 수 있었다. 이것은 영국군과[[영국군]]과 영국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 영국의 승리, 강제수용소 ===
[[1899년]]에 작은 국경도시 [[마페킹]](Mafeking, Mafikeng)에서 217일 동안 [[영국군]]은 보어인들에 대한 포위공격을 방어하는 데 성공하고 [[1900년]]에는 오렌지 자유국의 수도 [[블룸폰테인]]과 트란스발의 수도 [[프리토리아]]를 점령하였다. 이후 보어인들은 [[게릴라]]식 전략으로 전환하여 저항을 시도했다. 하지만 영국군의 명장 키치너 장군은 청야정술을 펼치기로 결정, 보어 인 농장들이 게릴라를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흑인]]들과 보어인들의 거주지 3만여 가구를 소각하여 활동근거를 말살하고, 여자와 어린이 보어인들을 [[강제수용소]]에 수용하였다. 이는 최초의 강제수용소였으며 훗날 [[나치]]의 [[강제수용소]]의 본보기가 되었다. 모두 2만 7,927 명의 비전투원 어린이와 여성이 [[영양실조]] 등으로 인하여 수용소에서 죽었다. 어린이들과 여성들을 수용소에 죽게 한 영국군의 행동은 고의적인 대량 [[학살]]이라기보다는 영국군 무감각의 산물이었다. 점점 열세에 몰린 보어인들은 외국에 도움을 요청하고 영국에게도 화친을 요청하였으나, 영국군은 이를 거부하고 결국 [[1902년]] [[5월 31일]] [[베르니이헝 평화 조약]]에서 트렌스발과 오렌지 자유국은 독립을 상실하고 영국의 [[식민지]]로 병합되었으며 [[1910년]]에 [[남아프리카 연방]]이 수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