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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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Carlo_Buonaparte.jpg|left|thumb|upright|나폴레옹의 아버지 [[카를로 부오나파르테]](Carlo Buonaparte)는 귀족 회의에서 코르시카를 대표한 의원이었다.]]
 
나폴레옹은 [[1769년]] [[8월 15일]], [[지중해]] 서쪽의 작은 섬인 [[코르시카 섬]]의 [[아작시오]]에서 [[토스카나]] 출신의 [[이탈리아]] 소지주(보나파르트) 집안에서 8명의 자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변호사이며 귀족회의 의원인 카를로 마리아 디 부오나파르테(프랑스식 이름은 샤를 마리 보나파르트보나파르트Charles Marie Bonaparte)였으며, 어머니는 마리아 레티치아 라몰리노였다. 출생시 이름은 나브리오네 디 부오나파르테(Nabulione di Buonaparte)였다. 이름을 나브리오네로 지은 것은 요절한 장남인 나브리오네에서 따온 것이다. 부오나파르테 가는 프랑스의 코르시카 점령에 항의하며 [[파스콸레 파올리]]가 이끄는 코르시카 독립운동에 참여하였으나 [[파올리]]가 망명하자 프랑스 측으로 전향하여, 가문의 명칭을 프랑스식인 보나파르트로 개명하고 귀족 자격을 얻었다.
 
유년기에 나폴레옹은 점잖은 성격을 가졌으며,하루 종일 독서에 심취하였는데, 특히 [[플루타르코스]]의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즐겨 읽었다. 처음엔 집안 살림이 어려워 형 조제프와 함께 학비를 내지 않고도 다닐 수 있는 [[수도원]] 부속학교인 도툉 중학교에 들어갔지만,곧바로 그만두고 [[1779년]] 아버지를 따라 프랑스로 건너가 브리엔느 육군유년학교에 입학했고, [[1784년]]에는 파리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다른 과목에 비해 수학만은 뛰어난 성적을 보였다. 졸업 시험 성적은 58명 중 42위였지만, 통상 재적 시간이 4년인 곳을 불과 11개월 만에 필요한 과정을 모두 수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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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4년]]에 정세는 한층 더 악화되어 프랑스 북동쪽에서는 슈바르트베르크와 블뤼허의 연합군 25만이, 북서쪽에서는 베르나도트 장군의 16만이, 남쪽에서는 웰즈 리 장군의 10만 대군이 프랑스 국경으로 진격하여 대포위망을 구축하였다. 이에 반해 나폴레옹은 불과 7만의 군세로 절망적인 싸움을 강요당했다. [[3월 31일]]에는 제국의 수도 파리가 함락된다. 나폴레옹은 종전을 목적으로 퇴위를 하겠다고 했지만, 배신한 마르몽 원수 등에 의해 무조건 퇴위를 강요당하여, 결국 [[1814년]] [[4월 16일]] [[퐁텐블로 조약 (1814년)|퐁텐블로 조약]]을 체결한 뒤 지중해의 작은 섬인 [[엘바 섬]]의 영주로 추방되었다. 이 일련의 전쟁을 ‘[[해방전쟁]]’이라고 부른다.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프랑스와 스페인, 이탈리아 곳곳에서 옛 영광을 되찾기 위해 왕정이 다시 복구되었다. 이들은 혁명 이전으로 되돌아가려고 하였다.
 
나폴레옹은 [[로마왕]]이었던 자신의 아들 [[프랑스의 나폴레옹 2세|나폴레옹 2세]]를 후계자로 하고되고 싶었지만, 동맹국 측으로부터 인정되지 못하였다. 또 베르나도트 역시 프랑스의 새 왕이 되기를 희망했지만 결국 주위의 반발을 사 포기하였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최종적으로 [[부르봉 왕가]]가 후계자로 선택되었다.
 
== 백일천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