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농민 혁명: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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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2월 15일]]([[음력 1월 10일]]) 탐학한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고부군의 동학도들과 농민군들이 쟁기와 낫 등 농기구를 들고 집단으로 무장 시위를 벌였다. 이들의 움직임은 곧 중앙정부의 탐관오리들에 대한 분노로 향했다. 보국안민과 폐정개혁을 기치로 내건 농민들의 기세가 걷잡을 수 없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ref name="paryoung436"/> 대원군은 이 기회를 이용, 동학 농민군과 접선하여 손자인 이준용을 추대할 계획을 세운다.
 
[[1886년]] [[흥선대원군]]은 민씨 정권이 〈[[조약]]〉을 체결하자 불만을 품은 [[위안스카이]](袁世凱)와 결탁하여 차남 [[이재황]](李載晃, [[대한제국 고종|고종]])을 옹립하고 재집권하려다가 실패하고,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농민 세력과도 연합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동학 농민운동이 실패로 돌아가 실현되지 못하였다.<ref name="paryoung442">박영규,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도서출판 들녘, 1996) 442페이지</ref> 동학군 중에는 전봉준과 같이 대원군의 문하에 출입하던 인물들도 있었고, 폐정개혁과 대원군 추대, 민씨 외척세력 척결과 개화파 척결을 외치는 목소리도 강력했다. 대원군과 이준용은 민씨 정권의 부패정치와 지방에 파견된 탐관오리들에 대한 반발을 주목했다.
 
한편 정부에서 안핵사(按覈使) [[이용태 (1854년)|이용태]]를 보내 이들을 위로하고 탐관오리 처벌을 약속하자 제1차 동학군은 저절로 자진 해산하였다.
 
=== 1차 봉기 ===
그러나 안핵사 [[이용태 (1854년)|이용태]]는 첫 봉기를 ‘동학도의 반란’으로 규정하고 “동비들의 뿌리를 뽑겠다”고 선언, 반란 관련자들을 ‘동비’(東匪)라 하여 동학도로 취급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동학과는 상관 없는 전라북도, 충청남도 지역의 농민들을 동학도라로 몰아 역적죄로 처벌하였다. 이용태의 강경책에 분개한 [[전봉준]]과 농민들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총기류와 농기구 등으로 무장한 뒤, 무장(茂長)의 [[김개남]], [[손화중]] 등과 함께 봉기하였다. 이것이 ‘1차 봉기’, ‘백산 봉기’, ‘삼월 봉기’ 등으로도 불리는 ‘'''제2차 동학 농민 운동'''’이다. 전봉준을 총대장, 김개남, [[차치구]], 손화중을 장령(將領)으로 삼은 농민군은 [[1894년]] [[음력 3월]] 하순에 백산에 모여 궐기한 뒤 전주성을 점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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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3월 21일]] 고부에서 봉기한 지 석 달, [[전주성]]을 점령한 농민군은 청, 일에게 군사주둔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전주화약〉을 맺고 해산했다.<ref name="parkus258">박은봉, 《한국사 100장면》 (가람기획, 1993) 258페이지</ref>
 
=== 전주화약과 청일 양국군의 주둔 ===
사태가 확산되자 고종과 왕비는 당황해하였다. 고종과 민씨 세력은 청나라에 원병을 청하였고, 청이 이에 응하자 일본 역시 텐진 조약을 빌미로 군대를 동원하였다. 이처럼 외세가 개입하자 농민군과 관군은 회담을 통해 화의를 약속하고 싸움을 중단하였다.<ref name="paryoung437">박영규,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도서출판 들녘, 1996) 437페이지</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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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개혁 추진 기구로서 [[군국기무처]]가 설치되었고, [[김홍집]]이 중심이 되어 내정 개혁이 단행되었다.<ref name="paryoung437"/> 그런데 이를 [[일본군]]이 사주한 것으로 안 동학 농민군은 반발, 다시 기의를 계획한다.
 
=== 2차 봉기와 실패 ===
일본은 이처럼 단독으로 조선의 내정 개혁을 단행함과 동시에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청나라]]군을 공격하여 승리한 뒤 정식으로 청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7월에 시작된 청일전쟁은 두 달 만에 구미 열강의 지지를 등에 업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ref name="paryoung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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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기한 농민군은 전봉준의 지휘 하에 공주성으로 다가들었다. 농민군의 최종 목표는 서울로 쳐들어가 부패한 정치가들과 외세를 몰아내고 나라를 바로잡는 데 있었다. 교조신원운동에서 고부 봉기, 그리고 제2차 봉기까지 전봉준과 농민군은 오직 그 날을 위해 달려갔다.<ref name="parkus258"/> 하지만 관군과 [[일본군]]의 화력에 밀린 농민군은 그 해 12월 패배하여 동학 농민군의 봉기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ref name="paryoung437"/>
 
=== 교조 신원운동과 대원군의 개입 ===
[[1864년]] 교조 [[최제우]]를 처형하여 군문 효수하였다. 이후 [[천도교|동학]]도들은 매년 교조의 무죄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는 등의 교조 신원 운동을 벌였다. 동학도들은 동학도들 대로 매년 한성으로 상경하여 교조 신원과 포교 허용을 청원하는 상소를 올렸다.
 
한편 [[1893년]] 초 [[흥선대원군]]은 동학도들이 상경하여 [[경복궁]] 앞에서 복합상소운동을 벌이는 기회를 이용하여 [[이준용 (1870년)|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하려 하였다.<ref name="p316">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2007.4, 경인문화사) 315~316쪽.</ref> [[정교]]는 [[1893년]] [[2월 11일]]부터 [[2월 13일]]까지 3일간 박광호를 소두로 하는 약 50명의 동학교도들이 상경하여 궁궐 앞에서 교조 신원을 탄원하며 연좌시위를 벌인 사건을 대원군이 시킨 일이라고 주장하였다.<ref name="p316"/> 이때 [[정교]]는 대원군이 은밀히 동학당 수만 명을 서울로 불러 모임을 갖고 장차 불궤를 도모하여 그의 손자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고 하였다.<ref name="p316"/>
 
== 고부 봉기 배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