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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2년 정월 양제는 113만 3800명을 이끌고 대대적인 고구려 공격에 나섰다. 출발만 해도 40일이 걸렸으며 그 행렬이 자그마치 1천여리(400km)가 되었다. 좌장군 우문술의 군사 45만명, 우장군 우중문이 이끄는 군사 45만명의 대규모 출정이었다. 그리고 양제 자신이 이끄는 군사 수만해도 26만명, 행렬이 200(73km)여리에 달했다. 거기다 병참지원까지하면 약 300만명에 달했다.
 
그들의 목적은 고구려의 수도 [[장안성평양성]]이었으며 이를위해 먼저 1차적으로 부수도인 평양성을국내성을 함락시킬 계획을 세운다. 그해 3월 고구려 국경지역인 요하에 도착하여 강을 건널 부교를 만들고 고구려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부교가 짧아 수나라 군사들이 건너지 못해 우왕좌왕하자 고구려군은 이틈을 이용해서 화살세례를 퍼부었다. 결국 강을 건너기에 앞서 많은 수나라 군사가 죽어야했다. 양광은 부교건설 책임자인 우문개를 질타했고 군사를 재정비한 다음 부교를 다시 만들어 도하를 시도했다. 이번에는 도하에 성공하여 고구려군은 수많은 수나라 군사앞에 무너져 1만군사를 잃고 요동성으로 대피한다.
 
도하에 성공한 양광은 요동성을 겹겹이 포위했고 100만군사면 함락은 시간문제라고 판단했지만 요동성은 천혜의 요새였다. 요동성 높이만해도 30m 게다가 주변의 산과 더불어 길이가 3.5km나 되었다. 수나라 군사는 성벽을 올라가려 시도하였지만 사다리가 요동성벽보다 낮아 올라갈 수 없었고 그틈을 이용한 고구려군이 돌과 화살세례를 퍼부었으며 결과적으로 피할 수가 없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성문과 성벽 등을 파괴하려 했지만 고구려군의 성은 중국의 돌성과는 전혀 다른 흙으로 만든 토성이었다 돌을 쌓으면 끝인 중국의 성과는 달리 고구려의 토성은 돌을 쌓은다음 흙으로 애워 감싸서 견고력이 더욱 단단한 성질을 가지고있기 때문에 중국의 성으로 기준으로만든 수나라의 무기로써는 부수지 못 한 것이 당연했다. 게다가 수양제가 자신의 명령없이는 절대로 움직이지 말라는 군령을 내렸기 때문에 공격할 기회를 노려도 수양제에게 보고를 해야했고 따라서 군사를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없어 공격을 해도 고구려군이 이를 먼저 눈치채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