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태정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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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5년간의 치세는 원 중기의 혼란상 가운데 예외적인 안정기로 이렇다 할 정변은 없었다. 그러나, 몽골 본토와 영하(寧夏) ・강회(江淮) 일대에 천재지변이 빈발하여 민심이 동요했으며, 소수민족의 준동마저 지속되는 등 사회 저변의 모순이 심화되어갔다. 평장정사 장규(張珪)가 테그시 일당의 잔당을 처벌할 것과 궁중내 승려와 도사의 추방, 용관(冗官) 정리, 광동(廣東)에서의 진주(眞珠) 채취 중단을 골자로 한 시정 개혁안을 제출했으나, 무위로 그치고 말았다. 장기간 북방에서 성장해왔기에 중앙 정계에 잘 적응하지 못한데다, 한지파(漢地派) 조신(朝臣)들과도 관계가 원만치 못했던 태정제는 제국의 통치권을 중서좌승상 다울라트 샤에게 일임한 것을 위시로 행정 ・감찰 ・군사 각 방면에 걸쳐 중용된 색목인 중심의 친신(親臣) 세력 배양과 몽골인 왕공귀족층에 대한 우대책에 힘입어 정권 기반을 유지하였다. 이는 [[아유르바르와다|인종]]과 영종대 한인 사대부의 성원을 받아 추진되어 온 유교적 이념에 부합된 지치신정(至治新政)을 부정함은 물론, 원 제국의 중국화와도 극명히 대비되는 보수 ・반동 노선으로 태정제 정권의 성격을 특징지은 대목이었다.
 
이러한 국정 노선은 다울라트 샤를 중심으로 한 권신 세력과 이에 반항하는 무종계 왕공 및 한인 집단간의 갈등이 점차 누적된 계기로 작용했는데, 이는 태정제 사후 양도내전(兩都內戰) 발생의 배경이 되었다. 태정제는 치화 원년([[1328년]]) 정월, 대도 동남쪽 통주(通州)의 유림(柳林)에서 사냥 도중 발병하였고, 병세가 악화되었음에도 중서성 관원들을 인솔해 여름 수도 상도로 행차했다가 7월 10일에 붕어하였다.
 
황태자 아라기박이 다울라트 샤의 추대를 받아 칸으로 즉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