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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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은 [[1922년]] [[7월 2일]]에 [[경상북도]] [[군위군|군위]]에서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김수환의 할아버지인 김보현은 [[로마 가톨릭교회|천주교]]를 신봉하다가 [[1868년]]에 발생한 '무진박해'로 인해 [[논산시|연산]]에서 관군에게 잡혀 [[순교]]하였을 만큼 집안이 대대로 독실한 [[로마 가톨릭교회|천주교]] 집안이었다. '무진박해'로 아버지를 잃고 유복자로 태어난 아버지 김영석은 박해를 피해 살던 고향을 떠나, 다른 신자들처럼 옹기장수로 전국을 떠돌았다. 그러던 중 [[1895년]]경 [[군위군|군위]]에 정착하고 그해 그곳에서 서중하와 결혼하였다.
어머니 서중하는 가난한 옹기장수인 김영석과 결혼하고 고단한 삶을 살았으나 자식들 앞에서는 한 번도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고 한다.<ref name="donga4">{{뉴스 인용|제목=“어머니 무릎서 신앙심 키웠다”|url=http://www.donga.com/fbin/output?n=200902170105|출판사=동아일보|저자=김갑식|날짜=2009-02-17}}</ref>그의 부모는 여덟 명의 자녀가 전부 로마 가톨릭 성직자가 되기를 바랐으나 넷째 형 [[김동한 (1919년)|김동한]]과 김수환 2명만이 그 꿈을 이루었다. 김수환은 8세에 [[군위초등학교|군위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파일:김수환1.jpg|썸네일|오른쪽|195px|보통학교 재학 시절의 김수환(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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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어릴 적 꿈은 상인이 되는 것이었다. 보통학교를 졸업하면서 읍내 상점에 취직해서 5년쯤 장사를 배워 독립하고서 25살이 되면 결혼할 생각이었다.<ref name="hankooki1">{{깨진 링크}}{{뉴스 인용|제목= "내 어머니처럼 큰 사랑 베풀지 못해 후회"|url=http://news.hankooki.com/lpage/life/200412/h2004121618443123340.htm|출판사=한국일보|저자=김범수|날짜=2004-12-16}}</ref> 그러나 상급학교 진학과 [[그리스도]] 신앙의 영향 등으로 [[성직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보통학교에 다닐 때 그와 넷째 형 [[김동한 (1919년)|김동한]]은 어머니로부터 불려가 나중에 [[사제]]가 되라는 권유를 받고 그 길을 걷게 된다.<ref name="donga4" /><ref>{{뉴스 인용|제목="자기 것 소중하면 남의 것도 소중한 법" <김수환추기경 어록>|url=http://www.heraldbiz.com/SITE/data/html_dir/2009/02/16/200902160626.asp|출판사=해럴드경제|저자=김재현|날짜=2009-02-16}}</ref>한편 어머니는 방랑벽이 있던 그의 맏형을 [[만주]]까지 찾아가 데려왔다고 하며 김수환은 훗날 어머니의 깊은 신앙심과 사랑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고 고백하였다.<ref name="donga4" />
[[군위초등학교|군위공립보통학교]]에 다니다가 김수환의 가족들은 [[대구광역시|대구]]로 이사하여 [[성 유스티노 신학교]]로 전학하여 [[1935년]]에 졸업했다. 이후 [[천주교 서울대교구|서울대교구]]의 신학교였던 [[동성고등학교|동성상업학교]]에 입학하여 학업을 지속하였다. [[1941년]] [[4월]]에 20세의 김수환은 [[천주교
==== 광복과 사제 서품 ====
[[파일:학도병 김수환.jpg|썸네일|135px|오른쪽|학도병 시절 [[전석재]] 신부와 김수환(오른쪽)]]
[[1944년]](당시
이듬해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서 다시 [[조치 대학교]]에 복학했으나 [[1945년]] [[9월]]에 자퇴한 후 귀국하고 이듬해 [[성신대학]]에 입학하여 [[1950년]]
=== 사목 활동 ===
==== 사제 서품 ====
김수환이 사제로서 첫 사목 생활을 시작한 곳은 [[목성동성당|안동성당]]이었다. 이어 [[1953년]] [[4월]]에 [[천주교
==== 주교와 대주교 ====
[[1966년]] [[2월 15일]] 김수환은 44세에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천주교 마산교구|마산교구]]장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5월 31일]]에 [[성지여자중학교|성지여자중]]·[[성지여자고등학교|고등학교]]의 강당에서 주교 서품식과 교구장 착좌식을 가졌다. 김수환 주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교구를 이끌었으며, 초대 교구장으로서 아무것도 없던 [[천주교 마산교구|마산교구]]에 발판을 마련했다. [[1967년]] [[천주교 서울대교구|서울대교구]]의 교구장인 [[노기남]] 대주교가 고령의 나이를 이유로 은퇴하자 [[1968년]] [[4월]]에 [[교황 바오로 6세|바오로 6세]]에 의해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교구장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대주교]]로 서임되었고 [[5월 29일]]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주교좌에 착좌하였다. 당시 [[천주교 서울대교구|서울대교구]]는 교구장이 1년 가까이 공석이었기 때문에 행정상태가 매우 어려운 형편이 었는데 김수환은 대주교로서 이를 잘 타개하여 안정된 행정을 수행하였다.
==== 추기경 서임 ====
{{경칭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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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 받았다.<ref>{{뉴스 인용|제목=추기경, 훈장추서 왜 없을까|url=http://www.heraldbiz.com/SITE/data/html_dir/2009/02/20/200902200448.asp|출판사=해럴드경제|저자=신상윤|날짜=2009-02-20|확인일자=2009-02-21}}</ref> [[박정희]]는 그에게 국가원로로서 자문을 요청하였으나 그는 조용히 [[박정희]]의 요청을 사양하였다.
==== 철권통치 비판 ====
그러나 그는 [[1972년]] [[10월 유신]] 이후 [[박정희]]의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지학순]] 주교가 연루돼 구금됐을 때는 석방을 탄원하러 [[박정희]] 대통령을 직접 찾아가 면담하기도 했고, 그 앞에서 정권의 독재를 강도 높게 비판하였다. 또한, 정교분리와 자유와 인권 등의 문제를 놓고 박정희와 갑론을박하다가 논쟁 끝에 박정희를 설득시켜 지 주교의 석방을 얻어냈다.<ref>{{뉴스 인용|제목=<nowiki>[선종 김수환 추기경 추모]</nowiki> MB,천주교병원으로 맺은 인연 각별|url=http://www.kukinews.com/news2/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921195419&cp=nv|출판사=국민일보|저자=하윤해|날짜=2009-02-17|확인일자=2009-02-21}}</ref><ref>{{뉴스 인용|제목=<nowiki>[사설]</nowiki> 세상에 큰 사랑 남긴 김수환 추기경|url=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90221027011|출판사=서울신문|날짜=2009-02-21|확인일자=2009-02-21}}</ref> [[1974년]] [[7월]] [[인혁당 사건]] 관련자에 대한 탄원서에 서명하였다.<ref>[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25737.html <nowiki>[</nowiki>길을찾아서<nowiki>]</nowiki> 인혁당 가족 돕자 시작된 미행과 도청 / 문정현] 한겨레신문</ref>
또한, [[1971년]]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 [[박정희]]가 암살당하자 직접 추모사를 낭독하기도 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nowiki>[김수환 추기경 추모 물결]</nowiki> 추기경님, 가시난닷 다시 오쇼서|url=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2/20/2009022000007.html|출판사=조선일보|저자=김지하|날짜=2009-02-20|확인일자=2009-02-21}}</ref> 이때 추모사 중에서 “인간 [[박정희]]가 이제 주님 앞에 섰습니다.”라는 표현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한편, [[박정희]]에 대해 그는
=== 1980년대 이후의 활동 ===
==== 5공, 6공 시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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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넷째 형 [[김동한 (1919년)|김동한]] 사제가 사망하자 그는 형이 마지막으로 거주하던 곳을 찾아 그곳에서 한동안 머물렀다고 한다.
김수환 추기경의 서경원 의원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할 것인지 사회적으로 관심이 있은 가운데 『종교인으로서 양심상 증언요청이 있을 때 피할 수 없었으며 재판부에서도 일단 나오면 증인으로 받아주겠다고 해 출석했다 그러나 출석여부에 관한 결정은 다른 신부들과 상의하지 않고 나혼자 결정했다』고 말해 교회 및 사법사상 처음으로 김수환 추기경이 1990년 4월 21일
▲김수환 추기경의 서경원 의원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할 것인지 사회적으로 관심이 있은 가운데 『종교인으로서 양심상 증언요청이 있을 때 피할 수 없었으며 재판부에서도 일단 나오면 증인으로 받아주겠다고 해 출석했다 그러나 출석여부에 관한 결정은 다른 신부들과 상의하지 않고 나혼자 결정했다』고 말해 교회 및 사법사상 처음으로 김수환 추기경이 1990년 4월 21일 오전10시 서울고등법원 형사2부(재판장 윤재식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서경원의원 밀입북사건 항소심 5차공판에서 1988년 9월22일 [[서경원]] 의원을 만나 나눈 대화내용, [[국가보안법]] 및 남북통일문제에 대한 견해 등을 증언했다. <ref>세계일보 김수환추기경 첫 법정증언 [정치>행정_자치 | 정치 | 사회] 1990-04-22</ref> 피고인석에 있는 [[서경원]]이 "북한으로부터 김수환의 방북을 추진하라"는 지령을 받고 자신을 만났다는 공소사실을 부인하면서 『서경원 의원이 나를 만나 방북사실을 털어놓은 것은 서경원 의원 나름대로 남북관계개선이나 종교자유를 위해 좋은 일을 하고 왔다는 사실을 교회의 책임자인 나에게 자랑하고 칭찬받고자 하는 것 같았다』고 하면서 『국가보안법상의 불고지죄가 정부로서는 필요할지 몰라도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를 믿지 못하게 하는 것 같다』며 『국가보안법자체도 사회여론이나 민주화의 시점에서 볼때 개정되거나 철폐돼야 할 것』이라고 소신을 밝혔다.<ref>한국일보 김추기경 증언/홍윤오 사회부기자(기자의 눈) [미분류] 1990-04-22 / 홍윤오</ref>
=== 선종 ===
[[2008년]] [[7월]]에 노환에 따른 폐렴으로 서울 [[강남성모병원]]에 입원하였으며, 약 7개월 정도 투병해 오다가 다음 해인 [[2009년]] [[2월 16일]] 오후 6시 12분경 병마를 물리치지 못하고 향년
== 공동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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