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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m 모바일 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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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의 군사정권 출범 뒤에도 재야 활동을 하였다. [[12.12 사태]] 이후 인사를 온 당시 [[전두환]] 소장에게 "서부 활극을 보는 것 같습니다. 서부영화를 보면 총을 먼저 빼든 사람이 이기잖아요."라고 비판했다.<ref name="hankyoreh1" /> 또 가장 마음에 아팠던 일로 [[광주 민주화 운동]]이었다고 말하면서, 그는 "개인적으로 가장 고통을 겪었을 때가 그때였어요. 사태가 그대로 알려지지도 않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대처할지도 모르는 상태이고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해봤지만 먹혀들어가지도 않고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은 것 같으니까…"라는 말을 남겼다.<ref>{{뉴스 인용|제목=<김수환 추기경의 웃음과 눈물>(종합)|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2505652|출판사=연합뉴스|저자=김지연|날짜=2009-02-16|확인일자=2009-02-22}}</ref>
[[파일:Myeongdongchurch.jpg|thumb|200px|명동성당]]
또한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당시에는 "이 정권에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라고 묻고 싶습니다. 이 정권의 뿌리에 양심과 도덕이라는 게 있습니까. 총칼의 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희 젊은이, 너희 국민의 한 사람인 박종철은 어디 있느냐?' '그것은 고문 경찰관 두 사람이 한 일이니 모르는 일입니다' 하면서 잡아떼고 있습니다. 바로 [[카인]]의 대답입니다."라며 강도높게 비판했다.<ref name="hankyoreh1"/> [[1987년]] 4.13 호헌 조치 당시에서도 미사에서 이를 철회하라는 요구를,<ref>{{뉴스 인용|제목=시대의 양심, 실천적 종교인|url=http://www.ytn.co.kr/_ln/0103_200902162100406340|출판사=YTN|저자=김세호|날짜=2009-02-16|확인일자=2009-02-21}}</ref> [[6월 항쟁]] 때는 [[명동 대성당명동성당]]에 들어온 시위대를 연행하기 위해 경찰이 투입되려 하자 "경찰이 들어오면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신부들, 그 뒤에 수녀들이 있을 것이오. 그리고 그 뒤에 학생들이 있을 것이오"라고 버틴 것도 그였다.<ref>{{뉴스 인용|제목=암흑의 시절 '민주화' 중심… 국민들은 그의 입을 쳐다봤다|url=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2/17/2009021700017.html|출판사=조선일보|저자=김한수|날짜=2009-02-17|확인일자=2009-02-21}}</ref>
 
[[1983년]] 넷째 형 [[김동한 (1919년)|김동한]] 사제가 사망하자 그는 형이 마지막으로 거주하던 곳을 찾아 그곳에서 한동안 머물렀다고 한다.
 
김수환 추기경의 서경원 의원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할 것인지 사회적으로 관심이 있은 가운데 『종교인으로서 양심상 증언요청이 있을 때 피할 수 없었으며 재판부에서도 일단 나오면 증인으로 받아주겠다고 해 출석했다 그러나 출석여부에 관한 결정은 다른 신부들과 상의하지 않고 나혼자 결정했다』고 말해 교회 및 사법사상 처음으로 김수환 추기경이 1990년 4월 21일 오전 10시 서울고등법원 형사2부(재판장 윤재식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서경원의원 밀입북사건 항소심 5차공판에서 1988년 9월 22일 [[서경원]] 의원을 만나 나눈 대화내용, [[국가보안법]] 및 남북통일문제에 대한 견해 등을 증언했다. <ref>세계일보 김수환추기경 첫 법정증언 [정치>행정_자치 | 정치 | 사회] 1990-04-22</ref> 피고인석에 있는 [[서경원]]이 "북한으로부터 김수환의 방북을 추진하라"는 지령을 받고 자신을 만났다는 공소사실을 부인하면서 『서경원 의원이 나를 만나 방북사실을 털어놓은 것은 서경원 의원 나름대로 남북관계개선이나 종교자유를 위해 좋은 일을 하고 왔다는 사실을 교회의 책임자인 나에게 자랑하고 칭찬받고자 하는 것 같았다』고 하면서 『국가보안법상의 불고지죄가 정부로서는 필요할지 몰라도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를 믿지 못하게 하는 것 같다』며 『국가보안법자체도 사회여론이나 민주화의 시점에서 볼때 개정되거나 철폐돼야 할 것』이라고 소신을 밝혔다.<ref>한국일보 김추기경 증언/홍윤오 사회부기자(기자의 눈) [미분류] 1990-04-22 / 홍윤오</ref>
 
=== 선종 ===
[[2008년]] [[7월]]에 노환에 따른 폐렴으로 서울 [[강남성모병원]]에 입원하였으며, 약 7개월 정도 투병해 오다가 다음 해인 [[2009년]] [[2월 16일]] 오후 6시 12분경 병마를 물리치지 못하고 향년 86세로 선종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장례식은 명동 성당에서 5일장으로 치러졌으며, 장례가 치러지는 동안 많은 조문객이 오갔다. [[2009년]] [[2월 20일]] 용인공원묘원에 유해가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