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라니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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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라니 전쟁'''({{작게|[[포르투갈어]], }}{{llang|es|Guerra Guaranítica}}) 또는 '''7개 전도소 전쟁'''(War of the Seven Reductions)은 [[예수회]]로 개종한 [[과라니족]] [[예수회 전도소|전도소]] 7개소가 [[에스파냐]]-[[포르투갈]] 연합군과 맞서 싸운 전쟁이다. 1750년 [[마드리드 조약 (1750년 1월)|마드리드 조약]]으로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남미 식민지 경계가 확정되면서 양국이 그 국경지대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이 사태가 벌어졌다.
 
[[우루과이강]] 동안에는 예수회가 전도소들을 세우고 원주민들에게 선교를 하고 있었고, 이 지역을 [[동안선교지]]라고 했다. 예수회는 이 지역의 선교에 상당한 성과를 거두어, 전도소들 주변은 인구 26,362명(예수회 자체 조사)의, 당시 남미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지역이 되었다.<ref>{{Cite서적 book인용|title=The Guarani Under Spanish Rule in the Rio de la Plata|last=Ganson|first=Barbara Anne|publisher=Stanford University Press|year=2003|isbn=0-8047-5495-0|location=Stanford, California|pages=91|이탤릭체=예}}</ref> 그런데 마드리드 조약에서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우루과이강을 국경으로 삼기로 하고 우루과이강 동안은 포르투갈, 서안은 에스파냐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1754년 예수회는 선교지에 대한 통제권을 포기하고 퇴거했다. 하지만 [[세페 티아라후]]가 이끈 과라니족은 이주 명령에 불복했다. 에스파냐군이 1754년 과라니족을 동안선교지에서 몰아내려 했으나 실패했다. 1756년 2월 10일, 에스파냐군과 포르투갈군 총 3,000 명이 과라니족과 싸웠다. 전투 결과 과라니족 1,511명과 백인 4명이 죽었고, 에스파냐-포르투갈 연합군이 동안선교지를 점령했다.
 
이후 1761년 [[엘파르도 조약 (1761년)|엘파르도 조약]]으로 마드리드 조약은 무효화되고 동안선교지의 전도소들과 그 주변 지역은 에스파냐에게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