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두천·포천-의정부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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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참모장 [[채병덕]]은 26시26일 01시, 제7사단은 동두천 방면으로, 새로 투입된 제2사단은 포천 방면으로 진격하여 각각 전날 북한군에 빼앗긴 이곳들을 탈환하라는 작전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에 대해서 제2사단장 등은 무모한 작전이라고 반발하기도 하였다. 명령에 따라, 제7사단은 전날 동두천에서 패퇴한 제1연대에게 동두천을 공격토록 하고, 새로 배속된 제18연대는 동두천을 서쪽으로 우회하여 [[양주군]] [[남면 (양주시)|남면]] 신산리로 반격을 개시하였다(8시). 이때, 동두천에 주둔한 북한군 제4사단은 의정부 전면공격을 피하고, 서쪽으로 우회한 은현로 방면으로 내려오려 하였으므로, 1연대는 동두천 읍내와 북쪽 5km의 소요산까지 진출한 반면, 18연대는 우회하던 북한군 제4사단과 조우하였고, 북한군은 동두천 남쪽 7km의 덕정의 좌우측을 협공하였다. 이로써 1연대는 퇴로가 차단되어 병력이 분산되어 버렸다. <!--요약문 작성 미완료-->
=== 반격 준비 ===
본부가 대전에 소재하고 있던 [[대한민국 2보병사단|제2사단]](사단장 [[이형근]] 준장)은 개전 당일 내려진 명령에 따라, 우선 가용병력인 1개 대대를 이끌고 25일 밤에 의정부로 당도해 있었다.<ref>《[http://www.imhc.mil.kr/user/imhc/upload/pblictn/PBLICTNEBOOK_201306250728397770.pdf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第3章 北傀의 全面南侵 4. 抱川-東豆川-議政府地區 戰鬪〉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 (1977, 개정판) 356쪽. <!-- 먼저 제2사단의 경우를 보면, 사단장 이형근 준장이 이날 08.00에 대전에서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김백일(金白一) 대령으로부터 『지금 적이 전면남침하고 있으니 병력을 끌고 빨리 올라와 달라.』는 연락을 받았을 때, 당장 가용병력은 대전 비행장을 경비중인 1개 대대 밖에 없었다. ...--></ref> 나머지 병력들은 26일에 올라올 예정이었다. 육군총참모장 [[채병덕]]은 [[대한민국 7보병사단|제7사단]] 사령부(사단장 [[유재흥]] 준장)를 2회 시찰하였다. 제7사단은 전날에 과반수의 병력을 손실한데다 잔병이 분산상태에 있고, 제2사단은 당장 가용병력이 1개 대대 밖에 없으니 병력과 장비의 우열도 문제이지만 보다 화급한 요건은 후방의 예비사단이 현지에 진출하여 전투전개를 할 수 있는 시간 문제였다. 그리하여 그는 시찰 후, 재경(在京)부대를 의정부지역에 우선적으로 투입하는 동시에 후방 3개 사단을 서울로 이동시키도록 조치하였다. 6월 26일 01:00에 7사단 사령부를 다시 시찰한 육군총참모장 채병덕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의정부를 고수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반격명령을 하달하였다. 제2사단장 [[이형근]] 등 군 지도층의 일각에서는, 반격작전을 전개할 시기가 아니라는 것, 병력을 축차로 투입하느니 보다 주력이 도착한 후에 전투력을 집중 운용해야 한다는 것, 북상중인 예비사단(제2사단 등)을 한강 남안으로 집결시켜 방어가 유리한 한강선 방어진을 구축함과 아울러 일선 분산병력을 수습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강력히 건의하였다. 그러나 채병덕 등 수뇌부는 정치적인 의의와 심리적 영향을 배려한 전략면에서 수도 서울의 포기는 있을 수 없다고 강경하게 맞섰다. 채총장은 무조건 반격으로 전환하라고 엄명하고 북한군 전차는 육탄공격으로 파괴하라고 강조하였다.<ref>《[http://www.imhc.mil.kr/user/imhc/upload/pblictn/PBLICTNEBOOK_201306250728397770.pdf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第3章 北傀의 全面南侵 4. 抱川-東豆川-議政府地區 戰鬪〉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 (1977, 개정판) 358쪽. <!--“... 이때 제7사단은 과반수의 병력을 손실한데다 잔병이 분산상태에 있고, 제2사단은 당장 가용병력이 1개 대대 밖에 없으니 병력과 장비의 우열도 문제이지만 보다 화급한 요건은 후방의 예비사단이 현지에 진출하여 전투전개를 할 수 있는 시간 문제였다. 따라서 군 지도층의 일각에서 『병력을 축차로 투입하느니 보다 북상중인 예비사단을 한강 남안으로 집결시켜 한강선 방어진을 구축함과 아울러 일선 분산병력을 수습하는 것이 可하다.』는 강력한 주장이 있는가 하면, 수뇌부에서는 『정치적인 의의와 심리적 영향을 배려한 전략면에서 수도 서울의 포기는 있을 수 없다.』고 이에 대하여 부동의하기도 하였다.”--></ref><ref>이형근은 이 명령에 따를 수 없어서 해임되었다고 회고하고 있으나, 다른 기록들과 맞지 않는다. : {{뉴스 인용|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5062500209203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5-06-25&officeId=00020&pageNo=3&printNo=16533&publishType=00020 |제목=6ㆍ25를 회고한다-이형근 |출판사 =동아일보 |날짜 =1975-6-25|인용문=<!-- “그런 상태에서도 채병덕 참모총장은 「의정부를 사수하라. 부대가 도착하는 대로 전선에 투입, 전적차대를 부수고 반격을 개시하라」는 명령을 내려요. 당시 상황은 반격전을 펼 수 없었어요. 그것보다는 우선 전선을 정비, 각 부대를 우리에게 유리한 장소로 집결시켜 반격준비를 해야 할 형편이었죠. 그렇게 해도 어려운 전세였는데 부대가 도착하는대로 무작정 투입시켜 반격하라고 하니 이는 「작전」이 아니었어요…이 준장 등 몇몇 지휘관들은 후방부대는 한강 이남에 집결, 한강을 제2의 방어선으로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채총장은 계속 무조건 반격만 명령, 의견이 맞섰다. 채총장=대통령의 명령이니 부대가 도착하는대로 오늘밤에 전선에 투입 반격하라. 이사단장=성공할 수도 없는데 불필요한 희생만 시킬 수 없다. 채총장=명령대로 안하면 군법회의에 넘기겠다. 이사단장=해임시켜 달라. 명령을 빙자해서 사단병력을 희생시킬 수는 없다. 결국 이 장군은 제2사단장에서 해임되고--> }}</ref> 이에 따라 6월 26일 아침부터, 전날 의정부로 후퇴한 제7사단은 [[동두천]]을 목표로 반격을 감행하게 되었으며, 제2사단은 [[축석령]]을 경유하여 [[포천]]을 목표로 반격하였다. 결국, 6월 25일~26일 사이에 의정부 지구에 투입된 증원부대는 1개 경찰대대를 포함해 총 15개 대대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부대들은 건제를 고려하지 않고 축차적으로 투입되었다. 더욱이 탄약을 위시한 각종 보급지원이 뒤따르지 못했으며, 유 · 무선통신망이 구성되지 않아 횡적 연락과 협조는 고사하고 상하급 제대간에도 통신이 소통되지 않아 전투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