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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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_조사연도 = <small>{{날짜|2018-01-31}}</sm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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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종 13년(1413년) 전국의 군현제도를 새롭게 개편하였을 때, [[공주목]]의 임내(任內)였던 [[유성현]]과 [[덕진현]]은 폐현되어 [[공주목]]에 속하게 되었고, [[진잠현]]은 공주목의 영현이 되었다.<ref>전진식, [http://www.cctoday.co.kr/news/quickViewArticleView.html?idxno=274217 1천년前 유성 복원 새장 열렸다], [[충청투데이]]</ref> 1602년 [[충청도]] [[감영]] 소재지가 충주에서 [[공주목]]으로 이전되면서 충청도의 중심지가 되었다.
 
유성은 오래전부터 [[유성온천]]으로 널리 알려져 왔다. [[백제]]시대 말 신라와의 싸움에서 크게 다친 아들의 약을 찾던 어머니가 백설이 뒤덮인 들판에서 날개 다친 학 한 마리가 눈 녹은 웅덩이 물로 상처 난 날개를 적셔 치료하는 것을 보고 아들의 상처를 그 물에 담그게 하여 말끔히 치료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태조 이성계가 조선의 도읍지를 물색하기 위해 [[계룡산]] [[신도안면|신도안]]으로 가던 중에 이곳에서 쉬어갔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조선 [[태종 (조선) 태종|태종]]이 왕자이던 1393년 이곳에서 목욕을 한 뒤 군사훈련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왕조가 시작될 무렵에는 임금이 쉬어갈 정도로 훌륭한 온천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13년 일본인들이 들어와 욕조 4개와 특등욕장 2동을 지어 근대적인 온천시설인 만년장을 준공시킨 것을 계기로 오늘날의 유성온천으로 발전해왔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온천욕을 위해 유성에 방문했던 일화 등도 전해지고 있다. 1994년 [[유성온천]]이 관광특구로 지정되면서 유흥업소 영업시간 제한이 없어지고 유흥업소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1990년 15개이던 유성의 목욕탕은 1997년 22개까지 늘었다.<ref>류용규, [http://www.daejonilbo.com/news/newsitem.asp?pk_no=831096 대전 재발견 - (23) 유성온천] [[대전일보]]</ref>
 
1973년부터 [[대덕연구단지]]가 개발되어 정부출연연구기관과 기업 연구소가 들어서면서 과학기술의 중심도시가 되었다. 1993년 대한민국 최초의 국제박람회기구 공인 엑스포인 [[대전 세계박람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면서 과학도시로서 위상을 확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