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당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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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완성 및 주상(奏上)은 후진 개운(開運) 2년([[945년]]) 6월로,<ref>왕부(王溥) 《오대회요》(五代会要)권18 전대사(前代史)에서.</ref> 그 이듬해에 후진이 멸망하는 바람에 편찬책임자가 도중에 교체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고, 덕분에 한 인물이 두 개의 열전으로 나뉘어 수록되어 있다거나 초당(初唐) 시기에 비해 만당(晩唐) 시기에 대한 기술이 다소 빈약하다는 등의 문제점이 제기되기도 한다. 때문에 후세의 평판은 좋지 않았고, 북송(北宋) 시대에 다시 《당서》(唐書)가 편찬되기에 이르렀다([[신당서]]). 그러나 거꾸로 당대 실록 등의 1차 사료의 원문들이 고스란히 인용되어 있어, 사료적인 가치에 있어서는 오히려 《구당서》가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발해]]사의 해석 문제에서 《구당서》와 《신당서》는 각기 "발해말갈의 대조영은 고려의 별종이다."<ref>《구당서》권199하, 열전149하 북적 발해말갈조</ref>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 고구려에 더부살이하던 족속인데 성은 대씨였다."<ref>《신당서》 권219 발해전</ref>라고 기술해, 발해의 건국 시조인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혹은 속말말갈계 고구려인)이냐 말갈인이냐에 대해 한국 학계와 중국, 일본 학계의 해석이 다르다.
 
또한 당시 일본열도에 대해 「왜국전」(倭國傳)과 「일본국전」(日本國傳) 두 열전이 입전되어 있는데, 「일본국은 왜국의 별종이다. 그 나라가 해 뜨는 변두리에 있으므로 나라 이름을 일본이라고 하였다. 또는 왜국이 스스로 그 이름이 아름답지 않음을 꺼려서 일본이라고 고쳤다고도 하고, 일본은 예로부터 소국이었는데 왜국의 땅을 병합하였다고도 한다.」<ref>구당서 권199상(上) 열전 제149상 동이(東夷) 일본국 “日本國者 倭國之別種也 以其國在日邊 故以日本爲名 或曰 倭國自惡其名不雅 改爲日本 或云 日本舊小國 併倭國之地”</ref>고 되어 있다. 이 기록은 송대 초기의 《[[태평어람]]》(太平御覧)에도 인용되었는데 이 기록에 대해서는 편찬과정에서 존재했던 일본의 존재에 영향을 받았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다른 설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일본의 모리 기미유키(森公章)는 「일본」이라는 국호 성립 이후에 최초의 [[견당사]](遣唐使)가 파견되었던 [[702년]] 이후에도 국호변경 사유를 일본측에서 특별히 밝히지 않았을 가능성을 지적하였고, 오오바 오사무(大庭脩)는 이를 간단히 편찬 과정에서의 실수라기보다는 「왜국전」과 「일본국전」의 왜국(일본) 관련 기사의 중절된 시간대에는 [[백강구 전투]] 및 [[임신의 난]]이 있었으며 당시의 중국측에는 임신의 난에 의해 「왜국」([[덴지 천황]]의 정권)이 무너지고 「일본국」(덴무 천황의 정권)이 성립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존재했기에 이에 대해 확실하게 결론을 내지 못한 채 이설로써 모두 병기했을 가능성을 지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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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이십사사]]
[[분류:기전체]]
[[분류:10세기 역사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