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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계몽운동 (1900 ~ 1910): 아버지 사망과 관련된 내용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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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지인을 찾아 내려갔던 [[강화도]]에서 3개월간 훈장일을 한 것을 계기로, 고향인 황해도 각지에 [[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 및 계몽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1901]]뇌졸증으로 반신불수가되 투병중이던 아버지 사망. [[1902년]] [[1월]] 할머니뻘 되는 일가 대부인의 소개로 그의 친정조카뻘인 최여옥(如玉)을 만나 맞선을 보고 약혼하였다. 이때 만난 우종서의 권유로 그는 탈상 후 자신의 일지에서 '예수의 도'로 묘사한 [[예수교]]를 믿기로 결심하였다. [[1903년]] 1월 약혼녀 여옥이 병사하였다. 김구는 홀로된 장모를 위로하고 예수교에 입교시켜 그리스도 신앙에 귀의케 하고 돌아왔다. [[2월]]에는 부친상 3년상을 탈상하고 [[장로교]]와 더불어 한국 [[개신교]]의 상징적인 [[교회]]인 [[감리교]]에 입교하였으며, 평양 [[예수교]] 주최 사범강습소에서 [[최광옥]](崔光玉)을 만났다. 그의 권유로 안신호(安信浩, [[안창호]]의 누이)와 약혼했으나 곧 파혼하였다.<ref name="기념사 2" /> [[1903년]] [[황해도]] [[장연군|장연]]에 봉양학교(鳳陽學校)를 설립하고 교육에 힘을 기울이다가, [[백남훈]](白南薰)에게 학교를 인계하고, 김구는 공립학교 교원이 되었다.<ref name=autogenerated7>[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03g1478b 김구 - Daum 백과사전<!-- 봇이 따온 제목 -->]</ref> [[1903년]] [[여름]]에는 [[농상공부]] 종상위원(種桑委員)에 임명되었다. 이는 공립학교 교원직과 함께 그가 [[대한제국]]에서 맡은 유일한 관직이었다.
 
[[1905년]]에는 [[을사조약]] 무효투쟁을 벌이는 등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진남포 예수교회 에버트청년회 총무로 서울 상동교회(尙洞敎會)에서 열린 을사조약반대전국대회에 참석했다. [[이동녕]](李東寧)·[[이준 (1859년)|이준]](李儁)·[[전덕기]](全德基) 등을 만나 을사조약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를 결의하고, [[대한문]] 앞에 모여 읍소를 하고, [[종로 (서울)|종로]]에서 을사조약 반대에 대한 가두연설을 했다.<ref name=autogenerated7 /> 그러나 정부의 강제진압으로 저지당하였고, 이 방법으로는 효과가 없을 뿐만 아니라 국민들 또한 지식이 없고 애국심이 박약하여 나라를 건질 수 없다고 판단하여 교육사업 등 계몽활동에 전념하기로 결정하고 돌아왔다.<ref name=autogenerated7 /> [[1906년]] [[종산군황해도]] [[문화군]] 초리면 종산리의 [[서명의숙]](西明義塾)에서 [[교원]](敎員)이 되었으며, [[1907년]]에는 국권회복운동의 국내 최대 조직이자 비밀결사조직이었던 [[신민회]]에 가입하여 [[신민회]] [[황해도]]지부 총감(摠監)으로 활동하였다.
 
[[1909년]] [[황해도]] [[안악군|안악]]의 [[양산학교]] [[교사]]를 맡았고, [[재령군|재령]] [[보강학교]](保強學交) 학교장에 초빙되어 학교장직을 겸임하였다. [[1904년]] 29세 때 [[최준례]](崔遵禮)와 혼인하였다.<ref name="weeklychosun" /> 그는 [[최준례]]를 곧 경성 [[경신여학교]]에 입학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