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백약: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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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백약은 [[564년]]에 정주(定州. 현 [[허베이 성]] [[딩저우 시]]) 안평현(安平縣. 현 [[허베이 성]] [[안핑 현]])에서 당시 [[북제]]에서 벼슬을 하고 있던 [[수나라]]의 내사령(内史令) [[이덕림]]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덕림은 당시 [[북제]]의 역사서를 편찬하고 있었으나, 끝내 완성에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이백약은 어릴 적 병약하였다. 할머니 조씨(趙氏)에게서 「백약」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그는 7세에 문장을 잘 지었고, 아버지의 친구 육예(陸乂)와 서릉(徐陵)이 지은 문장을 읽고 이해하기 어려운 한 구절을 해독하였으므로 주위의 놀라움을 샀다. [[음서]]로 삼위장(三衛長)으로서 [[북주]]의 조정에 사관하였다. [[수나라]] [[개황]] 원년([[581년]]), 태자통사사인(太子通事舍人)・동궁학사(東宮學士)에 임명되었다. [[599년]], 인수궁(仁壽宮)으로 소환되어 아버지의 안평공(安平公) 작위를 이었다. [[양소 (수나라 관리544년)|양소]]와 [[우홍]] 등에게 그 문학적 재능을 사랑받아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에 임명되었다. [[수 문제]]의 명을 받아 [[오례]]와 [[율령격식|율령]], [[음양]] 관련 서적들을 편찬하고 제정하였다.
 
일찍이 병으로 사인(舍人)의 직책을 사임했을 때 [[수 양제|양광]](훗날의 [[수 양제]])이 양주에 있었는데, 그가 이백약을 불렀으나 이백약은 부름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 일로 양제가 즉위하면서 작위를 박탈당하여 계주사마(桂州司馬, 현 [[구이린 성]] [[구이저우 시]])에 좌천되었다. 그곳에서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613년]], 회계군(會稽郡)에서 일어난 관숭(管崇)의 반란에 직면하게 되자, 성을 지키는 데 거둔 공적으로 건안군(建安郡, 현 [[푸젠 성]] [[푸저우 시]])의 군승(郡丞, [[군 (행정 구역)|군]]의 보좌관)에 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