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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에 일본 기원을 모델로 하여 바둑 조직 설립을 목표로 하여 [[1945년]]에 [[한성기원]]을 설립하였고, [[1948년]]에 [[조선기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1949년]] 다시 대한기원으로, [[1954년]] 사단법인 한국기원, [[1969년]] 현재의 재단법인 [[한국기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ref name="업적" /> [[1950년]]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실시된 승단 결정전을 통해 3단으로 인정받았다. 그 후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부상을 입었다. [[1954년]] 《위기개론》(圍碁槪論)을 펴내 일본식 바둑용어를 우리말로 고치는 데 큰 공헌을 했다.<ref name="업적" /> 종전 후에 다시 바둑 단체 설립을 진행하여, [[1955년]]에 [[한국기원]]을 설립하였다. [[1956년]]부터 시작된 [[국수전]]에서는 제1기부터 9연패 하는 등 50~60년대 한국 바둑계에서 최고 기사로서 활약하였다. 또 한국의 [[김인 (바둑 기사)|김인]], [[조상연]](조치훈의 형), [[조치훈]], [[조훈현]] 등의 일본 유학을 지원했다.<ref name="업적">{{웹 인용|url=http://www.tygem.com/news/news/viewpage.asp?pagec=1&seq=7424|title=조남철 선생의 7가지 업적|publisher=tygem.com|accessdate=2012-2-20}}</ref>
 
[[1983년]]에 9단으로 승단하였고, [[1984년]]에 한국기원의 명예이사장이 됐으며 [[일본기원]]으로부터 오쿠라상을 받았다. 1984년 일본기원대창상(日本棋院大倉賞), [[1989년]]에 [[은관문화훈장]]을 받았고, 1994년 바둑문화상 감투상을 받았고, [[1998년]]에 제4회 운경상 문화언론부문상을 받았다. [[동아일보]]는 [[1995년]] 명예 국수 칭호를 수여했다. 명예 국수는 조남철 9단이 유일하다.<ref>{{웹 인용|url=http://news.donga.com/3//20060703/8325129/1|title=별세한 조남철 9단…현대바둑 터닦은 반상의 개척자|publisher=news.donga.com|accessdate=2012-2-20}}</ref> [[2006년]]에 노환으로 84세로 사망했다. 빈소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조화를 보내 애도했고,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됐다. [[한국기원]]과 [[동아일보]]는 영결식장에서 고인에게 대한민국 최초의 대국수(大國手)칭호를 헌정하였다.
 
저서로는 <위기개론(圍碁槪論)>‧<사활의 기초>‧<행마의 급소>‧<흑백의 발자취>‧<정석정해>‧<포석의 요령>‧<일본명인기사전집>‧<바둑에 살다> 등이 있으며, 회고록 <세 번의 눈물>이 있다.<ref>[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8KOR_A1923_1_0033289&category=dirSer&isEQ=true&kristalSearchArea=P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