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나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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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금과 남송은 형제관계가 아닌 군신관게였다.
→‎역사: 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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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족은 [[요나라]]의 지배를 받으며, 하얼빈 동남쪽에 있었던 완안부를 중심으로 세력을 키웠다. 이후 완안부의 추장 아구다는 [[1115년]]에 요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 [[회령부|상경회령부]]에서 금나라를 세웠다. 금은 요의 군대를 격파하며 영역을 확대하고, [[북송]]과 동맹을 맺어 [[1125년]] [[금 태종|태종]] 때 요나라를 멸망시켰다. 그 후 북송을 멸망시키고 화베이 지역을 통치하려고 장방창(張邦昌)의 초(楚)와 유예(劉豫)의 제(齊)를 통해 간접 지배를 꾀했다. 그러다가 여의치 않자 직접 지배하기 시작했다.
 
[[1142년]]에 [[금 희종|희종]]은 남송과 조약을 체결했다. 그 조약에 따르면, 남송은 해마다 금나라에 세폐를 주고, 금의 황젠는송의황제 황제를은심할도송의 삼았다상경회령부에서황제를은 신하로았다상경회령부에서 [[중도 (금나라)|중도대흥부]](지금의 [[베이징]])로 옮기고 수많은 여진인을 화베이로 이주시켰다. 해릉왕은 종실 내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남송을 침공해서 통일 중국의 황제가 되려고 했다. 그러나 강제 징병에 시달리던 거란족이 반란을 일으킨 틈을 타 종실 내 반대 세력이 랴오양에서 오록(烏祿, [[금 세종|세종]])을 황제로 옹립했다. 세종은 남송과 국교를 회복하고 거란족의 반란을 진압하는 등 대내외의 안정을 회복했다. 그리고 관리를 숙정하고 긴축 재정을 운용해 정치·사회의 안정을 이룩했으며, 남송과 평화를 유지해 금나라 제일의 명군이 되었다. 또한 몰락하는 맹안·모극 호를 보호하고, 여진어 사용을 장려하며, 여진족의 풍습을 보호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뒤이은 [[금 장종|장종]]은 중국 문화에 정통했지만, 재정을 방만하게 운용한데다 황하 범람과 몽골계 유목민이 침입해서 재정이 부족해졌고, 실지 회복을 노리는 남송의 도전으로 심각한 재정난에 직면했다. [[금 위소왕|위소왕]] 때 몽골군의 침입으로 본거지인 중국 동북지방을 빼앗겼고, 남송과 [[서하]]의 공격도 받았다. [[금 선종|선종]] 때인 [[1214년]]에 몽골의 침입을 받고 수도를 변경으로 옮겼지만, 한인과 불화가 깊어져 더욱 혼란에 빠졌다. [[금 애종|애종]]은 변경을 탈출해 허난지역을 전전하다가 [[1234년]]에 채주에서 몽골과 남송의 연합군에게 포위당하자 자살했다. 뒤이은 [[금 말제|말제]]도 몽골군에게 살해되어 금은 10대 120년 만에 멸망했다.